학교 등굣길이 청소구역이다 보니 학교와 인근 마을의 경계에 놓인 쓰레기들이 늘 모호하다. 하루는 며칠째 방치된 쓰레기들을 해치울 요량으로 징계를 당해 교내봉사 중인 학생이 있는지 알아보려 학생부에 들렀는데, 그런 학생은 없고 대신 교실에서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가 발각(?)되어 벌을 서는 남녀 두 아이가 눈에 띄었다. 사람 좋은 학생부장 선생님은 그들에게 청소도 시키고 좋은 말도 좀 해달라고 오히려 내게 당부를 했다.

나는 잠깐 망설였다. 교실에서 이성 간에 어깨동무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잡혀와 벌을 받는 것도 그렇거니와, 징벌의 의미로 청소를 시킨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두 아이가 청소를 자청했다. 눈치를 보아하니 학생부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것보다는 밖으로 나가 청소를 하는 편이 더 낫겠다는 생각을 한 듯했다. 두 아이를 데리고 정문 쪽으로 가다가 남학생에게 물었다.
 

ⓒ그림 박해성


“둘이 사귄 지 얼마나 됐어?”

“오늘로 78일 됐어요.”

“어깨동무했다고 벌 받아서 억울하지 않았어?”

“아니요. 저희들이 잘못했는데요 뭐.”

그렇게 대답을 하고는 순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 아이에게 나는 하마터면 이렇게 반문할 뻔했다.

‘뭘 잘못했는데?’

만약 이런 말이 생각에 그치지 않고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면 아마도 이런 식의 설전이 오가지 않았을까?

“좋아하는 사람과 어깨동무한 것이 왜 잘못이야?”

“학교에서 그러면 안 되잖아요.”

“왜 안 되는데?”

“학교는 공부하는 곳이지 연애하는 곳이 아니잖아요.”

“학교는 왜 공부하는 곳이어야만 하는데?”

“예? 그거야. 당연히….”

언젠가 이런 얘기를 후배 교사에게 털어놓았다가 낭패를 본 일이 있다. 내 말이 꼭 옳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생각거리를 던진 것뿐인데도 전혀 대화의 진전이 없다가 나중에는 서로 언성만 높아졌다. 이런 일이 생긴 것은 진실과 상식의 차이 때문이 아니었을까? 진실은 물음을 먹고 자란다. 사회 통념상 자명해 보이는 것도 묻고 또 묻는 과정에서 진실이 드러난다. 그런 물음의 과정이 없었다면 여성참정권이라든지 자유연애와 같은 역사적 진보도 가능하지 않았으리라.

아이들도 자유로울 때 가장 행복하다

존 듀이가 ‘생활로서의 교육’을 상상한 것도 꽤 오래전 일이다. 학교가 공부하는 공간으로만 존재하기에는 그 기간이 너무 긴 것도 사실이다. 이성 간의 만남이 인간을 행복하게 해주는 한 요소라면 그것을 학창 시절 뒤로 유예하거나 학교 밖으로 내몰기보다는 학교 안에서도 잘 가꾸어갈 수 있도록 지도하고 도와줄 필요가 있다고 본다. 나는 불온한 교사일까?

나는 학교에서 아이들을 자유롭게 해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나는 내가 자유로울 때 가장 행복하기 때문이다. 학생들이라고 다를 리가 없지 않은가. 또 한 가지 이유가 있다면, 학교가 태생적으로 자유롭기 힘든 공간이기 때문이다. 학생을 개인으로 대하는 것보다 집단으로 관리하는 것이 더 편하고 효율적이라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 점에서 학교의 퇴행을 예측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길을 찾기 위해서 이런 물음을 던져보자. 학교가 본질적으로 자유로울 수 없는데 내가 교사로서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면 아이들은 어떻게 될까? 자유의 기쁨을 모르고 자라는 세대들이 자유 대신 오히려 방종을 일삼지 않을까?

기자명 안준철 (순천 효산고등학교 교사·교육공동체 벗 이사)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