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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은 몰라도 유치원생까지 ‘아엠에푸’란 말을 입에 올리던 2000년 당시, 어느 자리나 화젯거리는 역시 IMF와 드라마 〈허준〉이었다. 아비는 양반이나 어미가 노비라 천출의 한을 품고 살던 허준을 연기하는 전광렬은 마치 세상 모든 억울함을 홀로 짊어진 듯한 표정으로 ‘묵묵히’ 고난을 견딘다.

사실 극중에서 벌어지던 대개의 중상모략은 허준의 해명 한마디면 풀릴 만한 것들이었지만 그는 매번 소처럼 눈을 끔뻑이거나, 미간을 이마 쪽으로 한껏 올려붙이고 입을 오무려 아래쪽 치열이 살짝 드러나는 특유의 표정으로 그저 억울함만 표할 뿐이었다.

참고 참고, 또 참는 ‘남자 캔디’가 전하는 피학적 카타르시스.
다 같이 견디라는 시절이었고, 남의 부정을 고해바쳐 나만 살겠다는 행동은 결국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믿음은, 열심히 살았는데도 예기치 않은 역경에 부딪혀 막다른 곳에 다다른 이들이 가질 수 있는 마지막 자기 최면이 아니었을까? 결국 허준의 누명이 풀리는 순간, 전광렬의 눈은 살포시 아래를 향하고 입가는 겸연쩍은 미소마저 조심하려는 듯 단정하게 다물린다. 유례 없는 참을성과 겸손함이 극중이나마 보상받는 순간이다.

8년 후, SBS 〈왕과 나〉의 내시부 수장 조치겸을 맡은 전광렬의 미간에는 독기가 올라붙었다. 생식 능력이 없지만 아내를 맞고 양자를 들여 대를 이어나가던 내시들에게 예종이 금혼령을 내리자, 내시들은 머리를 풀고, 육근 단지를 앞세워 저항한다. 권력에 대한 욕망이 거세된 듯했던 예전 허준과는 달리, 〈왕과 나〉의 전광렬은 고개를 쳐들지 못하는 대신 억울함을 되씹으며 눈을 치뜬다.

극중 조치겸은 내시부를 마치 무장처럼 호령하는 강인함과 교활함이 두드러지는 인물이지만, 전광렬의 미간이 뿜어내는 그 특유의 상실감과 억울함에 대한 넓은 스펙트럼이 없었다면 반쪽짜리 캐릭터가 되고 말았을 터다. 재미있는 건, 예나 지금이나 전광렬의 연기를 볼 때면 부지불식간에 그 억울한 표정에 전염되어 간다는 것. 거울을 들어 확인해보자.

기자명 유선주 (월간 드라마틱 기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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