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빛〉정지아 지음창비 펴냄
선입견이란 무서운 것이다. 스물여섯 나이에 〈빨치산의 딸〉(1990)을 출간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는 식의 이력을 읽고 나면 그이의 소설은 어쩐지 읽지 않아도 다 읽은 듯한 기분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정지아의 첫 번째 소설집 〈행복〉(창비, 2004년)을 무심히 지나쳤다. 그 이후 매 계절 거의 빠짐없이 계간지에 발표된 작품도 어쩐지 읽게 되질 않았다. 제목 탓도 있었다. 봄빛, 풍경, 소멸, 순정, 운명… 어쩌자고 대부분 두 글자에 한 단어였다. 이런 식의 제목은 언뜻 무신경해 보인다. 리드미컬하게 만들어진 제목은 시 한 편에 육박하는데 그럴 기회를 왜 마다하는가. 게다가 80장 분량의 단편에서 ‘소멸’과 ‘운명’을 논하겠다니, 좀 무모하지 않은가. 아무튼 이래저래 인연이 닿지 않았다.

그 작품들이 최근 두 번째 작품집 〈봄빛〉(창비 펴냄)으로 묶여 나왔다. 예쁜 책을 앞에 놓고 있자니 그간의 선입견이 불편하게도 서걱거렸다. 그래서 2006년 제7회 이효석 문학상을 받은 작품인 〈풍경〉부터 담담히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문장은 아름다웠다. 공학적인 정확성과 서정적인 세련성을 함께 확보하고 있었다. 꼼꼼하게 세공된 문장이 아픈 가족사, 치매에 걸린 노모, 한평생 홀로 노모를 돌보며 산속에서 살아온 한 노인의 이야기를 실어 나르고 있었다. 무연히 읽어나가다가, 정신을 놓아버리고 웃음마저 잃어버린 노모가 돌연 웃음기 어린 얼굴로 “내 새끼, 그래 한 시상 재미났는가?” 하고 묻는 장면에서, 나는 조금 아찔했다. 다른 작품을 계속 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창비 제공정지아의 소설은 ‘흔히 그러는 대로’ 리얼리즘 작품으로 분류된다.
뒤이어 표제작 〈봄빛〉을 읽고 이 작가에 대한 확신과도 같은 신뢰를 갖게 됐다. 밥상에 ‘뚜부’(두부)가 올라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벌이는 서글픈 설전은 오랫동안 기억될 명장면이고, 병원에서 치매 판정을 받고 돌아오는 길에 노부모가 주무시는 동안 ‘나’가 눈물을 흘리는 대목은 읽는 이의 마음을 흔든다. “받은 것은 반드시 돌려줘야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냉정한 생명의 법칙이었다.”(〈봄빛〉) 〈소멸〉이나 〈운명〉 같은 작품들은 〈풍경〉이나 〈봄빛〉에 비해 상대적으로 관념적이라 느껴질 수 있겠다. 그러나 육화한 관념을 육성으로 말하고 있으니 이런 계열도 좋다고 생각한다. 이 책에 실려 있는 이 작품들을 흔히 그러는 대로 ‘리얼리즘’이라 불러야 할까? 아마도 그래야 할 것이다.

한국 문학에서 통용되는 리얼리즘 개념에 대해서는 애증이 있다. 좁은 의미의 리얼리즘은 갑갑하다. 재현되어야 할 ‘현실’이라는 것이 자명하게 존재한다고 전제하니까. 넓은 의미의 리얼리즘은 공허하다. 삶의 진실에 도달하는 여러 길을 모두 리얼리즘의 슬하에 두려 하니까. ‘지성’이 없는 우직한 재현과 ‘감각’이 없는 스타일을 리얼리즘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하는 경우도 더러 보았다. 그러나 지성과 감각이 있는 리얼리즘, 거기에다 진심과 열정까지 더해진 리얼리즘은 세간의 잔재주들이 결코 범접할 수 없는 기품에 도달한다. 정지아의 소설이 그 예다. “현실의 충실한 재현이 단순한 모사의 기술이 아니라 인간 진실을 상상하는 절실하고 비범한 열정의 소산임”(정홍수, 〈봄빛〉 표지 글)을 기꺼이 인정하게 된다.

정지아의 소설을 사랑할 수 없는 까닭

그러나 솔직히 말해야겠다. 이 소설들을 사랑할 수는 없다. 아픈 현대사와 그 질긴 흔적을, “고리 대금업자 같은 비정한 세월”(〈봄빛〉)과 “순진무구하게 잔인한 어린것들의 장난”(〈운명〉) 같은 운명을, 그 세월과 운명에 쓸려가며 살아온 우리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육신과 속내를, 그들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내밀한 애증을, 이 모든 것을 두루두루 아우르며 직시하는 이 아픈 소설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는가.

칼 프리드리히 폰 바이체커는 1930년대 말에 뒤늦게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1927)을 읽은 뒤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한마디도 이해하지 못하겠다. 그러나 이것이 철학이다.” 〈봄빛〉에 대해서라면 내 생각은 이렇다. “나는 한 편도 다시 읽고 싶지 않다. 그러나 이것이 소설이다.”

기자명 신형철 (문학 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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