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와 부모들이 아이 돌보기가 어렵다고 한다. 그 까닭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아이들이 말을 안 듣는다고 했다. 왜 당신들 말을 들어야 하지요, 했더니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한다. 교사와 부모가 아이들 말을 들어주지 않는데 아이들은 왜 교사와 부모 말을 들어야 한단 말인가. 아이들을 상식으로 대해야 한다. 아이들이 겪는 어려움은 바로 이런 상식이 무너진 부모와 교사의 태도에 뿌리를 두는 경우가 잦다. 아이들이 말을 듣지 않아 힘들다는 교사와 부모들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사실을 말하자면 아이들이 교사와 부모 말을 듣지 않는 것이 아니라 들리지 않는 것이다.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은 듣기는 들었으나 거부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거부할 권리가 있다. 아이들은 거부하면서 자신의 한 시절을 성숙시킨다. 교사와 부모가 아이들을 좀 봤으면 한다. 아이들을 가까이 보지 않으니까 이렇듯 말을 듣지 않아 힘들다는 성근 진단에 머무는 것이 아닐까. 아이들은 지금 교실에서 교사의 이야기와 집에서 부모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 무엇 때문일까.

앞서 이런저런 글과 책에서 나는 ‘TV를 치우고 아이들 이야기에 나서라’는 말을 해왔다. 그것이 아이들 삶과 교육과 미래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말이다. 텔레비전을 없애라니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하는 분들이 있다. 그분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보고 싶은 것 다 보고 아이 키울 수 있는 길은 없다고 말이다. 아이들 키우기 쉽지 않다. ‘꼬마 다방’이란 곳에 모여 아이들 옆에 놀게 놔두고 이웃 아줌마들과 뭐 사야 하고 어디 보내야 하고 텔레비전 봤더니 어쩌더라 등등 이런 얇은 앎으로 아이를 키울 수는 없다는 말이다.

텔레비전을 집에 두고 아이들과 10년을 보낸다면 텔레비전 앞에 마르고 고개 숙인 한 아이를 보게 될 것이고, 이름을 부르면 고개 정도 돌리는 아이를 보게 될 것이다. 10년간 텔레비전을 본 아이들이 부모나 교사가 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나 있는지, 듣지 못하는데 자기 이야기 하나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라. 게다가 TV는 날로 뻔뻔해지고 있다. 우리가 사는 곳이 속세라는 것을 안다. 나는 금욕하라고 TV를 보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첫아이를 TV 없이 맞이할 수 있는 것이 정상적인 부모의 사고라는 말이다. 지금 아이들과 부모와 교사의 손을 보라. TV를 손 안에 들고 다니고 있지 않은가. 집과 학교에 가면 컴퓨터에서 TV가 나오지 않는가. 상식을 가진 부모들이여, 이래도 집에 TV를 두어야 하는가. 참고로 영유아가 있는 집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 집은 세상과 다른 가치를 말해야 한다.

자기 전에 그림책을 읽어준다. 그림책이 아무리 길어도 38쪽을 넘지 않는다. 펼치면 19장면 정도이다. 글은 매우 적다. 시처럼 짧은 글과 19장면을 잠자리에서 아이가 보고 듣고 소화할 수 있을까. 어렵다. 다 듣고 나서 누워 생각하고 낮에 문득 떠올리고 저녁에 다시 같은 책을 가져와 또 읽어달라고 한다. 이게 아이들이다. TV를 보라. 1초에 30장면이 지나간다. 그림과 소리는 그림책을 읽어줄 때처럼 매우 아름다운가. 이런 TV를 두세 시간 보면서 10년을 보낸 아이가 부모와 교사가 하는 말이 들릴 리 없다. 아이들은 어제, 한 달 전에, 1년 전에 TV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소화시키느라고 오늘도 부모와 교사인 당신의 말에 귀 기울일 수 없다. TV를 치우고 아이들 이야기에 나서자. 무엇을 아이에게 줄 것인가에서 무엇을 아이에게서 덜 것인가 먼저 생각하자.

기자명 편해문 (어린이놀이운동가. 〈아이들은 놀이가 밥이다〉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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