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북에 있는 중국집 이름에 웬 압구정?’ 서울 성동구에 있는 블랙앤압구정을 찾아가는 길, 머릿속에 든 의문이었다. 기자를 만난 채혁씨(45)는 이런 질문을 수도 없이 받았다는 듯 스스럼없이 답했다. “제가 창업한 1990년대만 해도 제일 잘나가던 동네가 압구정동이었거든요. 대한민국 넘버원 중국집이 되고 싶다는 욕심에 이름을 블랙앤압구정이라 했지요.”

그로부터 15년이 흐른 오늘, 블랙앤압구정은 어찌 보면 엉뚱한 이유로 화제의 중심에 서 있다. 이른바 ‘철가방들이 만든 협동조합형 중국집’으로서 전국적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이다. ‘그래봤자 요즘 우후죽순 생겨나는 협동조합 중 하나 아냐?’라고 지레짐작할 일이 아니다. 이 식당은 협동조합기본법이 통과되기 훨씬 전인 2009년부터 협동조합 방식으로 운영돼왔다.

ⓒ시사IN 이명익블랙앤압구정 창업주인 채혁씨(오른쪽 앞)를 포함해 블랙앤압구정 지분을 갖고 있는 직원은 모두 18명이다.
발단은 창업주 채혁씨로부터였다. 채씨는 스스로를 ‘실패한 운동선수 출신 장사꾼’이라 소개한다. 군산상고 야구선수였지만 대학이나 실업팀으로 가지 못하고 일찌감치 생업전선에 뛰어들었다. 중간도매상, 중장비 대여업 등등을 전전하다 중식당을 해봐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이 1990년대 말. ‘요리는 할 줄 모르지만 음식 맛보는 데는 나름 일가견이 있다’는 어설픈 자신감 하나로 호텔 중식당 요리사를 꼬여내 주방장으로 스카우트했다. 그러고는 아무 연고도 없던 서울 성동구에 중국집을 열었다.

식당은 인력 관리가 가장 어려운 곳

초기에는 시행착오투성이였다. 그래도 채씨는 ‘좋은 재료와 성실한 서비스로 승부한다’는 원칙을 밀어붙였다. “내가 주방을 잘 모른다는 게 오히려 도움이 됐던 측면도 있다”라고 그는 말한다. 식당 매출이 떨어지면 주인은 초조해진다. 음식 재료를 덜 쓰거나 싼 것으로 대체하고픈 유혹에 빠진다. 그러나 자신의 경우 음식에 관한 모든 것을 주방장에게 일임한 이상 주방 일에는 일절 간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신 채씨는 마케팅과 직원 관리에 주력했다.

ⓒ시사IN 이명익2호점 대표 강태륜씨가 음식 배달을 하는 모습.
중국집·피자집처럼 배달 음식을 다루는 식당의 주인들이 한목소리로 호소하는 것이 인력 관리의 어려움이다. 블랙앤압구정 2호점 대표 강태륜씨(36)는 “중국집들이 장사가 안 되어 폐업하는 게 아니다. 90%는 배달원 구하기가 힘들어 폐업을 결심한다”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월급을 250만원 이상 줘도 사람 구하기가 힘든 게 이 바닥이다. 배달원들은 일당으로 10만원 이상씩 받고 일하는 걸 오히려 선호한다. 날씨가 궂은 날이면 일당조차 소용없다. 출근 약속을 일방적으로 깨는 일이 다반사다.

이에 비하면 블랙앤압구정은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직원들은 채씨를 ‘대장’ 또는 ‘형’이라 부른다. 때로는 친형처럼, 때로는 해결사처럼 자신들의 일에 나서주는 채씨에 대한 직원들의 믿음이 워낙 돈독하다. 그런 만큼 종업원 이직률도 다른 중국집에 비해서는 낮은 편이다. 그럼에도 이런 유대감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고 채씨는 말한다. 사회 낙오자, 신용불량자, 꼴통, 결손가정…. 세상 사람들이 중국집 배달원을 보는 눈은 차가웠다. 당연히 이들 스스로도 직업에 대한 자긍심이 없었다. 독립해 자기 식당을 차릴 꿈이라도 가지면 좋으련만 ‘식당이 100개 생기면 이 중 80개는 1년 안에 문을 닫는’ 현실에서  그 꿈조차 사치였다.

그러던 와중에 채씨의 인생을 바꾼 사건이 발생했다. 2007년 그는 성동구에 있는 논골신협 사람들과 함께 일본 오사카에 있는 공동체 마을 아사카로 견학을 떠났다. “며칠 여행이나 하고 오자”라는 꼬드김에 넘어가 따라나선 길이었는데, 이것이 그의 마음을 헤집어놓았다.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사람들이 서로 힘을 합쳐 회사를 세우고, 그 회사를 500명 이상 고용하는 규모로 키웠다는 사실이 인상적이었다. 부러워하던 그에게 문득 떠오른 생각이 ‘우리도 힘을 합치면 좀 더 오래, 탄탄하게 갈 수 있지 않을까’라는 것이었다.

논골신협 유영우 이사장은 “살면서 깨달음을 얻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깨달음을 실천으로 옮기는 사람은 많지 않다”라고 말한다. 유 이사장 말마따나 채혁씨는 그 드문 사람 중 하나였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 그는 직원들에게 식당을 공동 소유하고 운영하는 구조로 바꾸고 싶다는 구상을 내비쳤다. 직원들의 반응은? 한마디로 뜨악했다. “사장이 장사 접으려고 딴생각을 하나 보다” “이러다 뒤통수 맞는 것 아니냐” 수군거렸다. 그러나 채씨는 서두르지 않았다. 2년여에 걸쳐 직원들을 설득했다. 이 문제를 논의하는 직원회의만 30차례 넘게 가졌다. 그리고 2009년 말, 자신의 지분 일부를 직원 4명에게 양도한 것을 시작으로 채씨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켜나갔다. 돈이 없는 직원에게는 자신이 대출 보증을 서가며 출자를 독려했다(36쪽 상자 기사 참조).

2013년 7월 말 현재 블랙앤압구정의 지분을 가진 직원은 18명이다. 전체 직원이 40명가량이니 이 중 44%가 지분을 보유한 공동 사장인 셈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일단은 월 1회 배당 원칙이 큰 몫을 했다. 블랙앤압구정의 지분을 가진 18명은 매월 초 배당회의를 연다. 지난달 매출을 총결산한 뒤 각자의 지분에 따라 이익금을 배당하는 것이다. 이때 총이익금의 10%는 사업 확장 등을 위한 투자비로 떼어놓는다. 이렇게 꼬박꼬박 배당을 받은 결과 출자금으로 빌렸던 돈을 2년 새 다 갚은 것은 물론이고 2호점 개장 시 새로 지분을 사들일 수 있었다는 강태륜씨는 “나 같은 초기 출자자들이 큰 이익을 얻는 것을 보고 다들 자극을 받았던 것 같다”라고 말했다.

직원들이 독립하며 분점도 생겨

모든 정보를 공개한다는 원칙 또한 직원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공동 소유 형태로 바뀐 뒤 채씨는 출자한 모든 직원들이 돌아가며 장부를 쓰자고 제안했다. 그전에는 채씨 혼자 알아보는 약어로 쓰던 장부였다. 그 효과는 이중으로 나타났다. 일단은 경영에 대한 직원들의 이해가 높아졌다. 한편으로는 ‘왜 예비비로 500만원가량을 떼어놓느냐’ 따위 의심들이 사라졌다. 직원들이 장부를 정리하고 가게 살림을 하면서 그 이유를 절로 납득하게 된 것.

그렇게 협동은 서서히 위력을 발휘했다. 채혁씨는 협동조합형으로 전환한 뒤 가게 매출이 15%가량 늘었다고 말했다. 본인의 경우 지분은 줄었지만 이렇게 전체 매출이 확대되면서 이전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수입을 집에 가져다줄 수 있게 되었다. 직원들이 스스로를 공동 사장으로 여기면서 열심히 일한 결과다. 그 사이 성동구 일대에 블랙앤압구정 2호점(금호점), 3호점(중천점)도 잇달아 개장했다. 지분을 가진 직원들이 독립해 분점을 차린 것이다. 지난해 개장한 3호점 대표 정만철씨(40)는 “본점에서 충분히 노하우를 쌓은 만큼 성공을 자신한다. 1, 2호점 동료들이 신규 출자를 하면서 지원을 아끼지 않은 것도 큰 도움이 됐다”라고 말했다.

무엇보다 달라진 것은 사람들이다. 일단 이직률이 확 줄었다. 직원 40명 중 맨 마지막으로 입사한 막내가 올해로 3년차다. 뜨내기 생활에 익숙하던 이들이 중국집을 안정적인 일터로 여기게 된 것은 물론 창업 등 새로운 미래를 꿈꿀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덕분인지 지난 4년간 직원 6명이 새로 가정을 이루기도 했다.

단, 우려되는 점은 있다. 특유의 배당 방식 때문에 출자한 직원과 출자하지 않은 직원 간에 위화감이 생기는 문제 등이다. 분점이 늘고 매출 규모가 확대되면서 매년 지분을 재조정해 신규 출자자를 받고는 있지만 출자를 희망하는 모든 직원의 욕구를 수용하기는 역부족이다. 일단 블랙앤압구정은 △만 3년 이상 근무한 자(지배인, 주방, 홀서빙, 배달직원 포함)만이 출자 자격을 얻는다 △1인당 지분은 15% 이하로 제한한다는 내용 등을 골자로 한 정관을 새로 만드는 중이다. 정관 완성 즈음 노동자협동조합(직원협동조합)으로 정식 등록 절차를 마친다는 것이 이들의 구상이다. 상호 또한 ‘압구정’을 떼는 쪽으로 바꿀 예정이다.

김동준 성공회대 협동조합경영학과 교수는 “블랙앤압구정이야말로 협동조합의 강점을 가장 잘 살려낸 예다”라고 평가했다. 협동조합이라는 법적 형태만 갖추지 않았을 뿐 ‘공동 소유와 민주적 운영, 사업 기여에 따른 배당 우선의 원칙’이라는 협동조합 정신을 기반으로 모범적인 운영을 해왔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구성원들의 변화를 극적으로 이끌어냈다는 점이 특히 인상적이라는 그는 “결국 협동의 과정에서 신뢰가 쌓이고 이것이 성과로 이어지면서 이 모든 일이 가능했다고 본다”라고 말했다. 오늘날 많은 협동조합이 놓치고 있는 기본기의 힘을 블랙앤압구정이 직접 보여준 셈이다.

기자명 김은남 기자 다른기사 보기 ke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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