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10일 감사원은 “4대강 사업은 사실상 대운하를 염두에 둔 사업”이라는 감사 결과를 발표했다. 애초 수심 2m 안팎으로 계획되었던 4대강 사업은, 대운하 재추진을 염두에 둔 청와대의 압력으로 수심 6m의 ‘대운하 1단계 사업’으로 탈바꿈했다는 것이 감사 결과다.

MB는 대선 후보 시절 대운하 사업을 전액 민간 자금으로 진행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하지만 ‘위장 대운하 사업’으로 지목된 4대강 사업에는 국고 22조원이 투입되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헌정사에 유례를 찾기 힘든 초대형 사기극이 된다. 정권을 상징하는 국책사업의 목적을, 전 국민을 상대로 집권 내내 속였다. 의혹을 제기하는 야당과 언론과 시민사회를 대놓고 비난했다. 국고 투입으로 대선 당시 약속도 거짓말이 되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뉴시스〈/font〉〈/div〉2007년 6월17일 한반도 대운하 설명회에서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 경선 예비후보(오른쪽에서 세 번째 )가 기자들의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뉴시스 2007년 6월17일 한반도 대운하 설명회에서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 경선 예비후보(오른쪽에서 세 번째 )가 기자들의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전 집권세력은 즉각 반응했다. MB 청와대 마지막 대변인을 지낸 박정하 전 대변인은 7월11일 보도자료를 내고 “4대강 사업은 대운하를 전제로 하지 않았다”라고 반박했다.

두 가지 궁금증이 생긴다. 첫째, 전 정권은 정말로 ‘대운하 위장사업’을 한 걸까. 둘째, 박근혜 대통령은 그걸 몰랐을까. 박근혜 청와대는 분노할 자격이 있을까.

두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시사IN〉은 4대강 사업 계획이 태동한 2008년부터의 전개 과정을 되짚어봤다. 140쪽에 이르는 감사원 감사보고서와 더불어, 야권에서 손꼽히는 4대강 사업 전문가인 신우석씨(전 국회 보좌관)가 제공한 자료의 도움을 받았다(24~25쪽 인터뷰 기사 참조).

2008년 봄, 새로 출범한 MB 정부의 최대 공약이던 대운하가 위기를 맞는다. 4월 총선과 5~6월 촛불 정국을 거치며 여론의 거센 역풍을 확인한다. 6월19일, MB는 특별 기자회견에서 “대운하 사업도 국민이 반대한다면 추진하지 않겠다”라고 발표한다.

하지만 포기 선언 한 달 전부터 묘한 기류가 있었다. 5월13일 총선 당선자들과 MB의 청와대 오찬 회동. 정병국·정두언·강승규·진성호 등 친이계 핵심이 모였다. 이 자리에서 정두언 의원은 “한반도 대운하를 한강 개발과 같은 재정비 사업으로 우선 추진하고, 연결(운하 개통) 부분은 계속 논의하자”라고 2단계 추진론을 제안했다.

대운하 공약 우회로임을 공공연히 밝혀

지원사격이 이어진다. 대운하 공약의 핵심 브레인인 이화여대 박석순 교수는 5월23일 라디오 인터뷰에서 “4대강 정비사업은 대운하 1단계 착공을 의미한다”라고 말했다. 이만의 환경부 장관도 5월29일 “일단 하천별로 운영해본 뒤 운하가 별거 아니란 생각이 들면 낙동강과 한강을 연결하면 된다”라고 말했다.

6월19일 MB의 대운하 포기 선언 이후에는 어떨까? 기류는 마찬가지다. 관련 발언들을 모아보자. 12월4일 박병원 청와대 경제수석. “4대강 사업이 운하가 되느냐 안 되느냐는, 소백산맥을 넘어가면 대운하다. 사업을 다 해놓고 대다수가 (운하를) 연결하자고 하면 말자고 할 수는 없다.” 12월4일 이만의 환경부 장관. “국민들이 잘 몰라서 대운하를 반대한다. 여러분이 노이로제처럼 생각하는 운하 문제도 어느 땐가는 거론될 것이다.” 화룡점정으로, 포기 발언의 주인공인 이명박 대통령의 11월28일 발언. “국익에 도움이 된다면 대운하도 관계없이 임해라. 4대강 정비사업이면 어떻고 운하면 어떠냐. 그런 것에 휘둘리지 마라.”

즉, 당시 정권 핵심부는 4대강 사업이 대운하 공약의 우회로라고 공공연하게 밝혔다. 이 당시는 위기에 처한 대운하 공약을 어떻게든 살려내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대운하와 4대강 사업 사이의 선 긋기를 고민한 흔적이 없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청와대 제공〈/font〉〈/div〉2010년 8월21일 이명박 대통령(왼쪽)이 청와대에서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와 오찬 회동을 가졌다.
ⓒ청와대 제공 2010년 8월21일 이명박 대통령(왼쪽)이 청와대에서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와 오찬 회동을 가졌다.

 


일련의 발언들을 보면, 당시 정권 핵심부의 머릿속에 있던 것은 이른바 ‘청계천 모델’이다. 여론의 반대가 심하지만, 일단 완성해놓고 보면 여론이 반전될 것이라는 기대다. “국민들이 잘 몰라서 반대”(이만의), “대다수가 연결하자고 하면”(박병원) 등의 발언은 상징적이다.

당시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4대강 사업이 반드시 2012년 총선 이전에 완공되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이 역시 4대강 사업의 결과물이 여론을 반전시켜 선거에 호재가 되리라는 기대를 보여준다. 실제로 이명박 정부는 공기 단축을 위해 각종 무리수를 두면서 2011년 10월 4대강 사업 완공 선언을 한다. 여론의 반전은 없었다.

그런데 2008년 12월 중순부터 메시지가 극적으로 바뀐다. 12월10일 〈파이낸셜 뉴스〉는, 정종환 국토부 장관이 국토부 출입기자들을 불러 “4대강 사업은 대운하가 아니다”라고 설명하고, 일부 매체에는 이를 다룬 특별 기사를 써달라고 요청했다고 보도했다. 선 긋기가 시작된 것이다.

이후 정권 핵심부에서 4대강 사업과 대운하를 연결하는 발언이 거의 증발했다. 4대강 사업이 태생부터 대운하 1단계로 시작되었다는 정책 목표는 한때 정권 스스로 홍보하다시피 하던 것이었지만, 이때부터 돌연 ‘정부를 믿지 못하는 불순분자의 억지’ 취급을 받기 시작했다. 정권 차원의 거대한 말 바꾸기가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났다.

2008년 12월25일에는 총리실이 지원사격용 보도자료를 낸다. ‘4대강 살리기와 대운하 비교’라는 자료는 두 사업이 다르다는 근거를 이렇게 댄다. “대운하 사업은 수심 6.1m로 준설하고, 5~10m 크기의 대형 보를 건설. 반면 4대강 사업은 수심 2m를 유지하고, 1~2m 크기의 소형 보를 건설.”

얄궂게도 이 지원사격이 제 발목을 잡는다. 불과 6개월 후에, 4대강 사업 내역이 ‘10m 크기 대형 보 16개, 수심 6m’로 뒤바뀌기 때문이다. 총리실 기준에 정확히 부합하는 ‘대운하 사업’이 된다. 집권세력은 4대강 사업을 대운하 1단계로 추진할 셈이었는데, 총리실은 당시까지의 4대강 사업 계획(곧 폐기된다)만 보고 방어 논리를 만들었다. 권력 핵심부의 심중을 읽지 못한 총리실의 지원사격은 아군을 명중시킨 꼴이 되었다.

 

 

 

 

 


감사원 감사 보고서를 보면, 국토부는 애초에 수심을 6m까지 확보하면 사업비 과다, 생태계 악영향, 수질 악화 등이 우려되는 반면, 수자원 이용에는 큰 장점이 없다는 검토 결과를 낸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초기 계획도 수심 1~2m로 제출되었고, 총리실도 그 자료를 기준으로 보도자료를 만들었다. 그런데 어떤 과정을 거쳐 ‘수심 6m’라는 대운하 모델이 관철되었을까. 감사 보고서를 따라가 보자.

2008년 12월 국가균형발전위원회가 4대강 종합정비안을 보고한다. 이 보고서에는 수심 목표치가 없는데, 보고를 받은 대통령이 직접 수심 문제를 거론한다. “수심이 5~6m가 되도록 굴착할 것”(대통령 말씀사항 정리 문건). 앞뒤가 기묘하게 뒤바뀌었다. 치수 목적에 부합하는지가 아니라, 수심 5~6m를 확보할 수 있는지가 대통령의 관심사처럼 보인다. 이에 국토부는 “수심 5~6m 확보 방안은 현재로서는 보고서 포함이 불합리하므로, 4대강 마스터플랜 수립 시 검토하는 방안을 협의하겠다”라고 내부 보고한다.

2009년 2월, 국토부 4대강 살리기 기획단은 수심 확보가 “수자원 확보의 근본 대안이 안 된다”라고 보고했다. 다시 한번, 권력 핵심부가 제동을 건다. 2월9일 대통령실은 ‘사회적 여건 변화에 따른 운하 재추진 가능성’을 거론한다. 앞서 보았던 ‘청계천 모델’이다.

2009년 4월 중간보고 때가 되면, 국토부도 결정권자의 ‘핵심 관심사’가 무엇인지를 파악한 모습이다. “보 위치, 준설 등은 추후 운하 추진에 지장이 없도록 계획하겠다”라는 보고를 올린다. 수심은 4m로 깊어졌다.

4월17일, 국토부 차관 주재 긴급회의에 청와대 행정관이 참석한다. 이 자리에서 그는 ‘물그릇 추가 확보’를 요구한다. 4m도 부족하니 강바닥을 더 깊이 파라는 얘기다. 수심은 6m로 깊어졌다. 대운하 계획으로 회귀한 것이다.

2009년 6월29일 라디오 연설에서 MB는 “대운하의 핵심은 한강과 낙동강을 연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수심이나 보가 아니라 두 강의 연결 하나만을 운하의 특징으로 좁혀 주장했다. 이 말 또한 추후 뒤집힌다. MB는 퇴임 직전인 올해 1월 4대강 사업 핵심 멤버들과 만나 “(대운하는) 내가 거의 다 해놨기 때문에 나중에 현명한 후임 대통령이 나와서 갑문만 달면 완성이 된다”라고 말했다고, 7월11일자 〈한겨레〉가 보도했다.

4대강 사업이 ‘위장된 대운하 사업’이라는 의혹은 사업 추진 당시에도 여러 차례 제기되었다. 하지만 이 모든 과정에 귀를 막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인물이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다. 감사원 발표가 있던 날 이정현 청와대 홍보수석의 ‘센 논평’은, 박 대통령과 4대강 사업의 선 긋기 성격이 강하다. 이 수석은 “감사 결과가 사실이라면 국가에 엄청난 손해를 입힌 큰일이다. 국민을 속인 것이다”라고 논평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조남진〈/font〉〈/div〉2010년 7월29일 경기도 여주 이포보 공사 현장에서 시민단체 회원들이 농성 중인 환경운동가들을 응원하고 있다.
ⓒ시사IN 조남진 2010년 7월29일 경기도 여주 이포보 공사 현장에서 시민단체 회원들이 농성 중인 환경운동가들을 응원하고 있다.


2010년 8월21일 MB와 독대한 박근혜

MB 정부가 4대강 사업과 대운하의 관계를 부인하기 시작하던 2008년 12월16일, 박근혜 당시 국회의원은 “정부가 대운하와 관계가 없다고 하니 믿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국민을 속이는 것인데,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라고 말했던 적이 있다. 이정현 홍보수석의 “국민을 속인 것”이라는 논평도 이때 발언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즉, ‘박근혜는 MB 정부의 말을 믿었을 뿐이다’라는 스토리다.

하지만 앞서 보았듯, 당시 정부는 메시지를 수정하는 중이었고, 4대강 사업이 대운하의 우회로라는 권력 핵심부의 발언은 널려 있었다. 이날 박근혜 의원의 발언은 정부의 다급한 메시지 전환에 다급하게 화답해준 꼴이었다.

더 의미심장한 고비는 2010년에 찾아왔다. 이해 상반기를 뜨겁게 달군 세종시 수정안 논란에서, 박근혜 의원은 친박계 의원 40여 명을 이끌고 MB 정부가 추진한 세종시 수정안을 부결시켰다. 현재 권력과 미래 권력의 갈등은 극한까지 치솟았다. 현재 권력은 조기 레임덕의 위험에, 미래 권력은 MB 지지층 이탈의 위험에 직면했다.

이제 다음 관심은 박근혜 의원이 4대강 사업에도 제동을 걸 것인가였다. 4대강 사업을 대운하의 연장으로 이해한다면, 2007년 대선 경선에서 대운하를 반대한 박 의원은 4대강 사업 역시 반대해야 한다. 하지만 세종시 수정안에서 박 의원이 MB와 각을 세우면서, 이미 보수층 일각의 이탈이 일어나던 참이었다. 원칙대로 4대강까지 걸고넘어지기에는 부담이 너무 큰 국면이었다.

세종시 수정안 부결 이후 2개월이 지난 8월21일, 박 의원은 MB와 1시간35분간 독대를 한다. 현재 권력과 미래 권력이 갈등을 접고 ‘밀월’ 내지는 ‘타협’을 택한 분기점이었다.

이 ‘8·21 타협’은 ‘박근혜 집권’을 설명하는 데에도 중요한 변곡점이다. 박근혜 의원은 이후 보수 내부의 이탈 위험을 성공적으로 관리할 수 있게 되었다. 대표적인 한 장면만 보자. 2012년 총선을 앞두고 공천 몰살을 당한 친이계는 집단 탈당 기운이 높았으나, 김무성 의원(당시는 친이계 신주류로 분류됐다)의 주도로 ‘선상 반란’을 자체 진압했다. 친이계의 ‘협조’가 없었다면 총선 구도는 어그러졌을 것이고, 총선 결과가 나빴다면 대선가도 역시 대폭 수정이 불가피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조남진〈/font〉〈/div〉2011년 10월 경기도 여주 이포보 모습.
ⓒ시사IN 조남진 2011년 10월 경기도 여주 이포보 모습.

 


친박계도 더 이상 정부 핵심 정책에 제동을 걸지 않았다. 이 독대 이후, 친박계에서 나오는 메시지는 한결같이 4대강 사업에 각을 세우지 않겠다는 톤이었다(〈시사IN〉 제155호 커버스토리 ‘박근혜 흔들린다’ 참조). 그해 12월, 4대강 사업 추진에 필수적인 친수구역특별법은 친박계 의원들의 찬성과 박 의원의 불참 속에 가결된다.

당시에도 친박계는 ‘세종시’와 ‘4대강’의 차이를 설명해 박근혜의 선택을 변호하는 데 공을 들였다. 하지만 두 건 모두, 박근혜 의원이 반대 의사를 밝힌 적이 있던 ‘원칙’의 문제였고, ‘입법’으로 가부가 사실상 결정되는 건이었으므로 국회의원이 회피할 명분은 없었다. 유일한 활로는 “박근혜도 내용을 알 수 없었다” 하나밖에 없다. 이정현 홍보수석이 “속았다”라는 표현을 되살린 데에는 이런 맥락도 있어 보인다.

 

 

 

ⓒ뉴시스7월10일 최재해 감사원 제1사무차장이 4대강 사업에 관한 감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박근혜 본인의 자백성 발언도 나와

당시 권력 핵심부의 수많은 ‘자백’들을 박근혜 의원이 알지 못했다는 비현실적인 가정을 해보자. 그래도 문제는 남는다. 박 의원은 비상대책위원장 시절이던 2012년 총선 국면에서 이상돈 교수를 비대위원으로 앉힌다. 그런데 이상돈 교수는 MB 정부 내내 4대강 반대에 앞장선 인물이다. 그가 속한 운하반대전국교수모임은 2010년 1월에 “4대강 사업은 대운하 건설이 아니면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라는 성명서를 냈다. 운하반대전국교수모임에는 2007년 박근혜 캠프에서 대운하 반대 논리를 다듬던 교수들이 여럿 포함되어 있다. 박 의원이 내용을 몰랐다는 말이 성립하려면, 핵심 측근의 주력 활동 내용을 몰랐다는 더 이상한 가정을 해야 한다.

박근혜 본인의 ‘자백성 발언’도 있다. 2012년 12월 대선후보 TV 토론에서 박근혜 후보는 “4대강 사업은 원래 대운하를 하려고 하다가 그게 축소가 되어 4대강이 된 것이다”라고 말했다. 박 후보도 4대강 사업이 대운하의 연장선임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이는 청와대가 극구 피하고자 하는 그림이다. ‘세종시는 부결시켜놓고 4대강(즉, 대운하)에는 눈을 감은 박근혜’는 ‘신뢰와 원칙’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공동책임론’을 선제 차단하기 위해서라도, 전 집권세력과의 각 세우기를 마다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기자명 천관율 기자 다른기사 보기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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