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토머스 앤더슨의 〈마스터〉는 〈데어 윌 비 블러드〉 이후 5년 만의 작품이다. 오로지 자신의 욕망을 위해, 석유를 위해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달려갔던 남자의 이야기 〈데어 윌 비 블러드〉. 이번에는 물질적 욕망이 아니라 정신적 욕망을 찾아가는 남자다.

〈데어 윌 비 블러드〉가 그랬듯, 영화가 시작되면 10분 넘게 대사 없이 영상이 흘러간다. 제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 프레디 퀠은 미 해군으로 복무하고 있다. 일본이 항복하고 더는 전투가 벌어지지 않는 행복한 시간, 병사들은 해변에서 휴식을 취한다. 코코넛을 따서 마시고, 여인의 나체를 모래로 만들어놓고 감상한다. 프레디는 나체상에 섹스를 하고, 껴안고 누워본다. 사회로 복귀하기 위해 심리검사를 받는 자리에서, 프레디는 로르샤흐 테스트(개인의 잠재된 성격을 분석하는 검사법)가 보여주는 모든 그림을 여성의 성기라고 대답한다.

영적 자아를 발견하라는 남자

프레디는 뒤틀려 있다. 백화점에서 사진관을 하다가 한 여인을 만난다. 데이트가 실패로 끝나자 이튿날 프레디는 난동을 부리고 떠나버린다. 술에 취한 프레디는 부두에 정박된 요트에 들어가 잠이 든다. 그곳에서 프레디는 랭케스터 도드를 만난다. 전생을 기억해내고, 프로세싱을 통해서 자신의 트라우마(정신적 외상)를 직면하고, 영적 자아를 발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남자. 어쩌면 사이비 종교이지만, 지금 당장은 구원과 기쁨을 안겨주는 남자. 프레디는 랭케스터에게 술과 영감을 주고, 랭케스터는 프레디에게 안정과 평화를 준다.
 


프레디는 동물 같은 남자다. 그에게는 근친상간이라는 트라우마가 있었다. 운명의 여인을 만났지만 지레 떠나버리고 돌아가지 않았다. 자신이 직접 제조한, 독약이 될 수도 있는 술을 마시며 질주할 뿐이다. 랭케스터가 그를 잡아준다. 사람들은 랭케스터를 마스터라 부르지만, 프레디에게도 그런 존재일까? 랭케스터를 보는 프레디의 시선은 늘 흔들린다. 믿으면서도 믿지 않는다. 믿고 싶지만, 믿어지지가 않는다. 그래서 떠나간다. 랭케스터는 말한다. 마스터가 없는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고.

맞는 말이다. 프레디 역시 마스터를 갈구한다. 누군가가 자신의 상처를 치유해주고, 자신을 이끌어주기를 바랐다. 어쨌거나 랭케스터는 프레디가 자신의 트라우마와 직면하도록 만들어줬다. 프레디는 자신의 트라우마를 극복하지는 못했으나 바라볼 수는 있게 되었다. 그래서 떠났고, 다시 돌아온다. 하지만 알고 있다. 종교가 그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아니 믿는 것만으로는 자신이 바뀔 수 없다는 것을. 폴 토머스 앤더슨은 〈데어 윌 비 블러드〉에서 석유에 미친 주인공 플레인뷰의 반대편에 사이비 종교에 가까운 종교를 ‘만들어낸’ 남자 선데이를 위치시켰다. 그렇다면 〈마스터〉는 그 선데이를 더욱 가까이에서 바라보려 한 영화일까?

20여 년 전, 르포를 쓰겠다는 생각으로 흔히 사이비 종교라 부르는 집단을 6개월 정도 들락날락한 적이 있었다. 결국 르포를 쓰지는 못했지만, 그 집단에 들어오는 사람들의 마음은 어느 정도 알 것 같았다. 자신의 상처와 트라우마를 들여다보고, 모든 현실과 미래를 맡김으로써 얻어지는 평온과 행복. 달콤하지만 가고 싶지 않은 낙원. ‘마스터’를 받아들이는 순간, 모든 것은 조화로운 세상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프레디는 결국 랭케스터를 떠난다. 그들의 구원은 현실에서 발을 뗌으로써 가능한 것이지만, 프레디는 결코 그럴 수 없었다. 구체적인 욕망이 그에게는 중요했으니까. 그가 만든, 독약일 수도 있는 술만이 그를 달래고 흥분하게 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프레디는 다시 세상으로 돌아오고, 여인을 만나 섹스를 한다. 과거에는 할 수 없었던 일들을.

기자명 김봉석 (영화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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