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진전경련을 비롯한 재계 5단체의 높으신 ‘오빠’들은 성희롱 처벌이 경제를 살리는 데 걸림돌이라며 처벌을 완화해달란다. 장애인 채용 의무도, 육아휴직 해고 벌칙도 완화해달란다. 하여튼 할 일은 똑바로 안 하고….
솔직히 말하는 첫 번째 이야기. 나는 온전히 돈 때문에 일한다. 자아실현? 그런 거 모른다. 나 역시 ‘먹고사니즘’의 지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 글 위에 적힌 내 직업은 ‘에세이스트’이지만 사실 에세이스트를 겸한 직장인으로 허덕거리며 사는 중이다.

먹고사느라 돈이 필요한지라, 소득 없는 부양가족을 두 사람이나 거느린 세대주인지라 난 더럽고 짜증나고 힘들고 싫어도 웃는다, 대한민국 직장인이 다 그렇듯이. 결혼 안 한다는 처녀나 죽겠다는 노인의 거짓말을 훌쩍 뛰어넘는 한국 최고 거짓말이라는 “에이 이놈의 회사 때려치운다” 타령을 한 달에도 수십 번 해가면서. 가끔은 삼겹살 냄새 뒤집어쓰며 젊음을 태우다가, 이게 정말 알파걸은 아니더라도 자아실현 신나게 하고 근사하게 살겠다던 내 길 맞나, 늦기 전에 다른 거 해봐야 하지 않을까 고민한다. 이런 이야기는 아마 나뿐만이 아니라 보통 직장인이 한두 번은 겪은 이야기일 것이다.

이제 솔직히 말하는 두 번째 이야기. 나는 두 번 이상 사내 성희롱을 당한 적이 있다. 그 순간 나를 엄습했던 가장 강렬한 감정은 고립감이었다. 뒤에 이 사실을 동료 남성 직원에게 털어놓았을 때 그들은 분개했다. 분개의 1차 대상은 나였다. “사람이 왜 그렇게 비겁해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뺨이라도 올려붙였어야죠!” 기가 막혔다. 바야흐로 ‘네가 당할 만하니까 당했다’고 탓하는 세상에서 ‘그 자리에서 뒤엎지 못해서 비겁하다’고 탓하는 세상이 도래했다. ‘입 다물고 있어라’에서 ‘발 벗고 싸워라’로 주문은 바뀌었지만, 괄호 안에 숨겨진 말은 여전하다. ‘입 다물고 있어라, (너 혼자).’ ‘발 벗고 싸워라, (너 혼자).’

이후 나는 매일 직장 ‘전선’에서 싸우는 다른 여성은 어떻게 생활하고 있을까 하는 비애감이 들었다. 까놓고 말해서 나는 그나마 정규직이고 대졸 경력 사원이며 비교적 성평등 의식이 철저히 박힌 ‘발랑 까진 여자’다. 이른바 ‘비치(bitch)’인 나도 이런 기분인데, 비정규직에 나보다 어리고 학력이 낮으며 보수적인 성의식을 주입받으며 성장한 ‘착한 여자’들은 도대체 무슨 일을 당하면서 어떤 기분으로 일한다는 말인가?

사내 성희롱, 분명한 잣대와 처벌 법규 필수

난 나 그림
성희롱은 기준이 모호하기 때문에 당사자에게 더욱 큰 고립감과 당혹감을 안겨준다. 성희롱이냐 아니냐를 규정하는 잣대와 법규는, 물귀신처럼 피해자의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 애매함을 덜고 상황을 객관화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

그러나 전국경제인연합회와 대한상공회의소를 포함한 재계 5단체의 높으신 ‘오빠’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성희롱 처벌이 기업 활동에 걸림돌이 되니 처벌을 완화해달라는 것이다.
 
그거 말고도 장애인 채용의무 완화 어쩌고 하는 걸 보니 자기네는 평생 장애인이 되지 않으리라 자신하는 것 같고, 육아휴직 중 해고 벌칙을 완화해달라는 걸 보니 과연 따님들 임신해서까지 험하게 직장 내보낼 생각은 전혀 없으신 사나이 중의 사나이이신 것은 확실하다. 이러면서 저출산은 다 우리 같은 ‘남의 딸년’들 책임으로 돌리는 게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니 당신은 딸도 없냐는 질문은 전혀 안 통하겠고, 다만 내가 묻고 싶은 것은 이것밖에 없다.

오빠들, 기업 활동은 그거 안 하면 못해? 회사가 일하는 데지 그거 하는 데야? 경제를 세우랬지 누가 그거 세우랬어? 하여튼 하라는 일들은 똑바로 안 하고….

※ 외부 필자의 기고는 〈시사IN〉의 편집 방침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기자명 김현진 (에세이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