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남국립극장 무대를 실험무대로 탈바꿈시킨 〈테러리스트 햄릿〉, 신들린 연기와 결합한 물체, 소리, 몸짓 언어가 관객의 상상력을 무한 자극하는 〈레이디 맥베스〉는 고목에 핀 매화처럼 값진 연극이다.
혹시 근자에 연극 보신 적 있으신지? 뮤지컬과 오페라가 공연장을 장악한 지금, 웬 연극 타령이냐고? 제작비에 비례해 다양한 볼거리로 ‘정직하게’ 화답하는 수입 또는 라이선스 뮤지컬이 대세인 측면에서 보자면, 상대적으로 ‘가난한’ 우리 연극은 그 초라함이 더욱 커질밖에. 그러나 부디 속단하지 말기를….

올봄, 나는 고목에서 꽃을 피운 매화처럼 값진 연극 두 편을 보았다. 예술의전당 토월극장 무대에 올랐던 한태숙 연출의 〈레이디 맥베스〉와 옌스-다니엘 헤르초크가 연출한 국립극단의 〈테러리스트 햄릿〉. 400여 년 전에 쓰인 셰익스피어의 이 ‘고전’은 걸출한 연출가의 실험정신에 힘입어 21세기 감각을 따라잡는 현대 예술로 당당히 비상하고 있었다.

〈레이디 맥베스〉는 개관 20주년을 맞은 예술의전당이 관객 1000여 명과 연극 전문가 80여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다시 보고 싶은 ‘최고의 연극’으로 선정된 작품이다. 서주희·정동환의 몰입 연기, 진흙(죄)과 밀가루(순수)와 물(정화) 같은 물체를 도입해 ‘물체극’이라는 새 용어를 탄생시킨 이영란의 오브제 창작, 영혼 밑바닥을 울리는 박재천의 라이브 타악 연주, 높낮이와 강약이 다른 오묘한 구음으로 극적 상황을 암시하는 김민정의 정가…. 내면 깊숙이 자리 잡은 죄의식의 뿌리를 파고들어 가는 이 연극이 칭송받아야 할 덕목은 수없이 많다. 신음 터져나오기 직전의 긴장감으로 공연을 보는 동안 내 머릿속에는 지난 가을에 관람한 그리스 국립극단의 〈일렉트라〉가 주었던 충격과 감동이 스쳐가고 있었다.

무대와 밀착되는 일체감 ‘만끽’

국립극단의 〈테러리스트 햄릿〉은 어떤가. 헤르초크는 무대 뒤쪽 끝에서 객석 중간까지 폭 4.5m, 길이 13m의 통로형 무대를 설치하고, 배우들이 객석 출입문으로 등장하고 퇴장하게 함으로써 달오름극장을 혁신적인 입체 무대로 변형했다. 청바지를 입은 햄릿은 샹들리에서 대롱대롱 매달리는 곡예 연기를 하고, 평상복 차림의 배우도 휴대전화와 디지털카메라를 들고 다닌다. 햄릿 역의 서상원은 거칠게 행동하는 테러리스트의 폭력성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오필리어의 머리채를 잡고 긴 무대를 질질 끌고 가는 광기 어린 ‘햄릿’에게 ‘고뇌하거나’ ‘우유부단한’ 수식어는 당치 않다. 뇌관 폭발 직전의 긴장감으로 지켜보는 동안 3시간여는 어느덧 지나가 버린다. 

이 두 작품의 공통점은 객석의 전부 또는 일부를 무대로 끌어올려 관객과 밀도 있는 교감 나누기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그동안 연극 무대의 네모 공간을 정면에서만 바라보던 관객은 무대 위에서 배우를 가까이 지켜보거나 배우에게 이끌려 극에 직접 참여하기도 한다. 무대에서 객석으로의 일방통행이 아닌, 쌍방향으로 열려 있는 소통 구조에서 관객은 무대와 밀착되는 일체감을 맛본다. 〈레이디 맥베스〉를 관람한 관객이 자신의 블로그에 남긴 후기를 보자. “무대 위에 객석의 설치는 관객으로 하여금 마치 그리스 비극에서의 코로스 역할을 하는 듯한 기분을 주어 극의 일부가 되게 한다. 무대를 밟는 것만으로도 벌써 재미있다.”(ID 소행성)

사실 나는 연극만 사랑하는 마니아는 아니다. 평소 장르 구분 없이, 수입이든 창작이든 가리지 않고 보는 ‘잡식성’ 관객이다. 어떤 공연이든 간에 나를 사로잡는 것은 ‘참신성’이다. 연기든, 연출이든, 무대든, 음악이든, 안무든 뻔하지 않고 ‘펀(fun)’한 요소를 발견하면 행복에 겨워 하룻밤을 송두리째 바친 억울함(?)을 잊는 것이다. 도발적인 발상으로 국립극장 무대를 전위적인 실험 무대로 탈바꿈시킨 〈테러리스트 햄릿〉, 그리고 신들린 연기에 결합한 물체·소리·몸짓 언어가 관객의 상상력을 무한 자극하는 〈레이디 맥베스〉. 벅찬 희열감을 안겨준 연극 두 편에서 나는 한국 연극의 희망을 보았다. 한국 연극의 매력에 퐁당 빠졌으니, 올해는 더 자주 대학로 소극장에 가봐야겠다. 더욱이 올해는 한국 연극 100주년을 맞이하는 해 아닌가. 사실 현실이야 뭐 볼 게 있는가.

※ 외부 필자의 기고는 〈시사IN〉의 편집 방침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기자명 이성남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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