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캐나다 퀘벡. 어머니의 유언집행인(공증인)이 스물두 살 된 쌍둥이 남매 앞에서 고인의 유서를 읽는다. 수의도 관도 없이 땅에 묻되, 자신의 얼굴이 바닥을 향하게 할 것. 어떤 기도도 하지 말고 비석도 세우지 말 것. 공증인은 두 남매에게 각각 한 통씩의 밀봉된 편지를 건네며 계속했다. 먼저 맏딸 잔느에게 “공증인이 너에게 봉투 하나를 건네줄 것이다. 그 봉투는 네 것이 아니다. 네 아버지를 위한 것이다. 그분을 찾아가서 봉투를 전해다오.” 다음은 막내아들 시몽에게 “너에게 봉투 하나를 건네줄 것이다. 그 봉투는 네 것이 아니다. 네 형을 위한 것이다. 그를 찾아가서 봉투를 전해다오.” 곧바로 드니 빌뇌브 감독의 영화 〈그을린 사랑〉을 떠올린 독자도 많겠지만, 이 지면의 주빈은 그 영화의 원작인 와즈디 무아와드의 〈화염〉(지식을만드는지식, 2013)이다.     
 

ⓒ이지영 그림

1964년 레바논. 열다섯 살 난 기독교계 집안의 소녀 나왈은 팔레스타인 난민이자 무슬림인 와합을 사랑했다. 이 사실에 분노한 오빠들은 두 사람이 만나는 밀회 현장을 덮쳐 와합을 총살하고 여동생마저 죽이려고 했으나 할머니의 저지로 물러난다. 나왈은 할머니가 시키는 대로 출산한 아이를 고향에서 먼 레바논 남부 고아원으로 보내고, 자신도 고향을 떠나 도시로 간다. 할머니는 “읽는 걸 배워라. 쓰는 걸 배우고, 셈하는 걸 배우고, 말하는 걸 배워라. 그것만이 우릴 닮지 않는 유일한 기회다”라면서, 배우게 되면 아무도 쓸 줄 아는 사람이 없는 이 마을로 돌아와 묘비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달라고 부탁한다.

3년 후,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나왈은 고향으로 가서 할머니와의 약속을 지켰다. 그리고 바로 그해, 남부에서 레바논의 기독교 민병대와 팔레스타인 난민 사이에 분쟁이 벌어지자 그녀는 아이를 찾기 위해 남부로 떠난다. 나왈은 탯줄을 끊자마자 헤어지게 된 갓난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더라도, 널 영원히 사랑”할 것이며 “함께하는 행복”을 갖겠다고 맹세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아이를 찾을 단서는, 할머니가 아이의 오른발 뒤꿈치에 먹물로 새긴 점 세 개.

레바논 민병대와 팔레스타인 난민 사이의 비극

레바논 남부를 전전하는 중에, 나왈은 팔레스타인 난민을 가득 태운 버스가 기독교 민병대의 공격을 받아 통째 불타는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원래는 그녀도 휘발유를 흥건하게 뒤집어쓴 버스 속에서 타죽게 되었으나, 십자가를 내밀며 “당신들과 똑같은 사람”이라고 고함을 친 끝에 가까스로 생명을 건졌다. 그 화염은 나왈이 믿던 신마저 불태우면서, 그녀를 팔레스타인 무슬림 저항 조직 가운데 하나인 샴세딘에 가담하게 만든다. 군사 훈련을 마친 그녀는 이름난 기독교 민병대 지도자를 암살하고, 크파르 라야트 감옥에 10년 넘게 감금된다.
 

〈화염〉와즈디 무아와드 지음,최준호·임재일 옮김 지식을만드는지식 펴냄

한편 고아원에 보내졌던 나왈의 아들은 고아원이 해체되면서 샴세딘의 보호를 받은 뒤, 소년 저격수가 된다. “사람을 죽이는 기계”로 자라난 니하르 하르마니는 자신이 유명해지면 어머니가 찾아올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번번이 상대편 저격수의 조준경을 조준해 그들의 눈에 총알을 박아넣었던 그는 어느 날 기독교 민병대에 생포된다. 적은 그의 솜씨가 아까워 전향을 시키고, 고문 기술자로 새로 태어난 아부 타렉은 크파르 라야트 감옥으로 파견된다. 

태어나자마자 버려진 니하르 혹은 아부의 발뒤꿈치에 새겨진 먹물 문신은 그가 ‘부은 발’이라는 뜻을 가진 오이디푸스의 재현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이 작품은 소포클레스보다 중동 현대사와 더 밀착해 있다. 〈화염〉의 배경이라고 할 수 있는 레바논 내의 기독교 민병대 세력과 팔레스타인 난민 사이에 벌어진 유혈 비극은, 1948년 팔레스타인 땅에 이스라엘이 건국되면서 시작됐다. 시온주의자들이 팔레스타인인이 거주하고 있던 땅을 빼앗으면서 팔레스타인인은 인근 중동 국가로 흩어졌고, 아랍과 벌인 수차례의 전쟁에 승리하면서 이스라엘의 영토가 커질수록 더 많은 팔레스타인 난민이 생겼다. 특히 1967년 제3차 아랍·이스라엘 분쟁(6일 전쟁)과 1973년 제4차 분쟁(10월 전쟁)을 거치면서 이스라엘과 국경을 마주한 레바논 남부에는 50만명에 가까운 팔레스타인 난민이 몰려들었다. 인구의 30%밖에 되지 않는 레바논 기독교 세력은 이런 사태가 마땅치 않았고, 이스라엘은 레바논 기독교 정당이자 민병 조직인 팔랑헤당(Falange Party)과 한편이 되어 팔레스타인 난민 학살을 도왔다. 나왈의 마음을 지옥불에  던져넣은 ‘버스 학살’ 사건은 1975년 4월13일에 있었던 실제 사건이다.

〈화염〉은 레바논의 역사를 작품 곳곳에 차용하고 있는데, 가장 놀라운 것은 나왈의 실제 모델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1988년 소하 베차라는 나왈처럼 기독교 민병대 지도자 앙투안 라하드의 암살을 시도하고 무려 10년 동안 지하 감옥에 투옥됐다. 그녀는 옆방의 포로가 고문을 받거나 자신이 고문을 받으러 갈 때 늘 노래를 불러 ‘노래하는 여인’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이 작품을 쓰기 위해 그녀를 파리에서 만났던 작가가 그때 어떤 노래를 불렀느냐고 묻자, ‘아바(ABBA)’라고 대답했다. 나는 울컥했다. 그녀에게는 ‘임을 위한 행진곡’ 같은 노래가 없었다. 다시 말해, 그녀는 준비된 투사도 아니었고, 어떤 이념에 투신한 혁명가도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팔레스타인인의 인권과 생명이 존중되기를 바랐던 평범한 기독교도였다. 영화에서 나왈이 그랬던 것처럼 그녀는 단 두 발의 총탄만 발사했다. 작가가 라하드를 죽이지 못한 것을 후회하지 않느냐면서 왜 탄창을 다 비우지 않았느냐고 질문하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것은 어떠한 중요성도 지니고 있지 않다. 중요한 것은 라하드가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것을 모든 이들이 아는 것이었다. 하나는 레바논인을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팔레스타인을 위한 거였다.”

워낙 충격적인 모티브가 이 작품을 〈오이디프스 왕〉과 관련시키지만, 진실은 같은 작가의 〈안티고네〉와 더 가깝다. 나지라(할머니)→나왈→잔느로 이어지는 묘비명 세우기가 그것을 입증한다. 무엇보다 안티고네나 나왈의 희생은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의무로부터 비롯하며, 어떤 곤경을 무릅쓰고서라도 세계의 참상을 애도하고자 한다는 게 중요하다. 레바논의 비극에 관심이 있는 독자께는 아리 폴먼·데이비드 폴론스키의 만화 〈바시르와 왈츠를〉(도서출판 다른, 2009), 박노해의 〈여기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만 같아요〉(느린걸음, 2007), 놈 촘스키 외 〈촘스키, 고뇌의 땅 레바논에 서다〉(시대의창, 2012)를 권한다.

기자명 장정일 (소설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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