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적마다 맛난 음식을 배불리 먹여주는 푸근한 인심, 서울성곽 아래로 펼쳐진 수려한 경치와 뻐꾸기 울음소리를 곁에 둔 북정마을의 매력을 이야기하던 중이었다. “가난하지 않았으면 꼭대기 산동네를 왔겠어? 가진 돈으론 평지서 살 수 없었으니까. 그런데 올라와 살아보니 별천지 같은 거야. 못살아도 흉볼 사람 없고. 가난한 사람은 이런 데 어울려 살아야지.”
나아가 그분은 “우리는 항시 위에서 이 절경을 바라보며, 아랫것(?) ‘내려다보며’ 살아” 하면서 활짝 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사는 재미를 부자들은 모를걸. 우리만 아는 거야. 가난한 사람들만 아는 행복이지.”
가난까지도 긍정적으로 재해석하는 그분의 태도, 발바닥 삶에서 나온 지혜가 짙게 묻은 생생한 육성을 들으며 생각에 잠겼다. 초라한 달동네의 삶이 행복이고 별천지인 까닭은 무엇일까? 도대체 행복이란 뭐지? 서울에 발붙이고 사는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어떻게 살았나?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줍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냐는 친구의 말에 그랜저로 대답했습니다(그러자 친구는 람보르기니로 답했다는 패러디물도 있더라)” 따위의 광고가 판을 치듯, 그간 우리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소유물로 삶의 무게를 측정해왔다. 친구들을 짓밟고 올라서는 게 당연시되는, 영화 〈배틀 로얄〉식 생존경쟁이 정석처럼 통용됐다. 성공·군림·명예·부의 축적과 같은 거창한 구호를 삶의 목표인 양 여기며 살았다.
우리가 망각한 삶의 가치와 행복
그러나 ‘북정마을 살이’의 소탈한 즐거움을 전하는 그분의 말에는 우리가 망각해버린 삶의 가치와 행복이 자연스레 녹아 있었다. “집 마당에서 식구들과 고기를 구워 먹으며 깔깔대고 있는데, 큰아들이 ‘저 건너편 성북동 부잣집 사람이 이걸 보면 얼마나 우스울까?’라고 말하더라. 그러자 작은아들이 ‘형, 우리가 행복하면 됐지 왜 다른 사람 눈치를 봐? 우리는 이렇게 좋은걸’ 하더라.”
그분의 말은 계속됐다. “저기 사는 아무개는 항시 밥이라도 있음 해오는 거야. 배고픈 사람 함께 나눠 먹고. 하나가 좋으니 다 그런 분위기야. 일요일 노는 날이면 모두 빙 둘러앉아 네 거 내 거 없이 나눠 먹는 거지.” “겨울에 눈 많이 오면 꿩들이 마당을 서성거려. 먹을 게 없어서 배가 고픈 모양이야. 그럼 보리쌀 좀 가져다놓지. 얼마나 좋아. 그것들도 먹고살려고 내려왔는데.”
우리가 다시 ‘마을’을 화두로 삼는 건, 잊고 살았던 평범하지만 소중한 풍경을 재조명하는 의미다. 삶의 넉넉함을 소유에서 찾지 않는 모습, 더불어 나눔으로 느끼는 무한 행복, 자연과 벗 삼고 이웃과 함께하는 따스한 일상이 발산하는 평온함에 가치를 부여하는 활동이 마을 만들기다.
고급 아파트와 그랜저가 주인공이 아니라 김재동 할머니 같은 사람. 즉, 가난마저도 행복이라 여기는 민중의 소박한 생활 속 지혜를 포착해, ‘이름을 불러주는’ 게 우리가 일구려는 마을 공동체에 깃든 핵심 정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