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2일 새벽. 강서희씨(33)는 첫돌을 세 달 앞둔 딸 도연이의 울음소리에 눈을 떴다. 거실에서 TV 소리가 나기에 밖으로 나갔다. 남편은 소파 위에 쓰러진 듯 누워 있었다. 이상했다. 단박에 느낌이 좋지 않았다. 119에 신고를 하고 심폐소생술을 하면서도 이미 숨이 멎었다는 것이 손으로 느껴졌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남편은 이미 사망한 뒤였다. 2011년 12월3일 결혼한 그녀는 신혼생활 2년도 채 되지 않아 남편과 사별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강서희씨 제공〈/font〉〈/div〉〈div align=right〉〈font color=blue〉〈/font〉〈/div〉고 권문석 알바연대 대변인(35)의 아내 강서희씨(33)는 영결식 때 쓰일 팜플렛을 직접 만들었다.
ⓒ강서희씨 제공
  고 권문석 알바연대 대변인(35)의 아내 강서희씨(33)는 영결식 때 쓰일 팜플렛을 직접 만들었다.


강씨의 남편인 고 권문석 알바연대 대변인(35)은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정확한 부검 결과는 3주 뒤에 나오지만,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서는 사인이 심장마비라고 했다. 세상은 그의 죽음을 ‘권문석 알바연대 대변인 자택서 사망’ ‘35세 요절’ ‘돌연사’ 따위 제목의 단신으로 전했다. 168cm의 작은 체구. 혀가 짧아 별명이 ‘문덕이’이고, “한 문장에 ‘뭐냐면’이란 말이 세 번 들어가는”, 달변가는 아니었던 대변인. ‘최저임금’ ‘기본소득’과 같은 키워드를 검색해 사람들이 무슨 얘길 하는지, 관련 기사는 얼마나 실렸는지 매일 들여다봤던 사람. 그의 죽음은 조용했지만 화제가 됐다. 한때 ‘권문석’이란 이름이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기도 했다. “죽어서도 대변인이다”라고 활동가들은 서로를 토닥였다.

권씨는 1978년 2월5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누나 2명을 둔 막내아들은 1996년 대학에 입학한 뒤로 줄곧 캠퍼스보다는 ‘현장’을 맴돌았다. 졸업 후에도 사회당이나 진보신당에서 활동하며 그가 가장 힘을 쏟은 건 ‘기본소득 운동’이었다. ‘조건 없이 모든 사람에게 기본소득을 지급하자’는 생각을 널리 알리고 공유하는 데 힘을 썼다. 국제학술대회도 여러 차례 준비해 실행에 옮겼다. 정책을 만들고, 유인물을 뿌리고, 행사를 진행하는 대부분의 일이 그의 몫이었다. 그런 그를 두고 주변 사람들은 ‘1인 4~5역을 했던 사람’ ‘끌어주기보다 밀어주던 사람’이라고 입을 모았다.

‘기본소득’이라는 거대한 꿈을 현실로 만들던 그는, 지난 해부터 청소년 노동 문제로 관심을 돌렸다. 기본소득이라는 장기적 목표도 중요하지만, 당장 최저임금도 못 받고 열악한 환경에 힘들어하는 청소년, 청년 등 ‘아르바이트 노동자’들이 눈에 밟혔다(아르바이트 노동자라는 말은 그가 알바연대 활동을 하면서 만들었다. ‘알바생’이 아니라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이어가는 노동자라는 의미다). 그는 지난 1월2일 출범한 ‘알바연대’에서 대변인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현행 4860원인 최저임금을 1만원으로 올리자고 주장했다. 알바연대는 근로조건이 열악한 업체 5곳을 ‘알바 5적’으로 선정하거나, ‘쉬고 싶다’는 의미로 명동 거리에 드러눕는 등 여러 퍼포먼스를 시도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이명익〈/font〉〈/div〉강서희씨(33)가 남편인 고 권문석 알바연대 대변인(35), 김성일 최저임금 1만원위원회 위원장이 공동 집필하고 강씨가 디자인한 '기본소득 노트'(왼쪽 푸른 책자)를 꺼내보이고 있다.
ⓒ시사IN 이명익 강서희씨(33)가 남편인 고 권문석 알바연대 대변인(35), 김성일 최저임금 1만원위원회 위원장이 공동 집필하고 강씨가 디자인한 '기본소득 노트'(왼쪽 푸른 책자)를 꺼내보이고 있다.


“남편은 정책 분야에서 1인자가 되고 싶어 했다”라고 아내 강씨는 전했다. “늘 대안을 고민하던 사람”이었다고 옆에서 지켜본 이들은 덧붙였다. ‘최저임금 1만원 아카데미 종일 특강’에 강사로 나서 2시간 동안 알바연대 회원들을 대상으로 강의한 게 그가 한 마지막 활동이다. 그는 이 강의를 위해 A4 용지 70쪽이 넘는 자료를 준비했다. 각종 통계 수치와 표가 가득한 ‘논문집’이었다. 권씨는 이날 강의를 들은 회원들에게 최저임금 인상에 부정적인 경영자총협의회의 논리를 반박하라는 숙제를 냈다. 숙제 검사는 끝내 하지 못했다.

권씨와 기본소득 운동을 함께했던 김성일 최저임금 1만원위원회 집행위원장(34)은 “우리끼리는 과거 활동을 ‘헛발질하던 때’라고 표현하곤 했다. 하지만 (알바연대 활동을 두고는) ‘이번엔 헛발질이 아닌 것 같다’고 이야기하곤 했는데, 권문석의 활동이 빛을 막 보려 하는 시점에 떠나게 돼 안타깝다”라고 말했다. 김씨는 생전에 함께 의논하던, 기본소득을 주제로 한 대중서 집필을 권씨 대신 이어가기로 했다. 출판사 디자이너로 근무하며 권씨와 함께 정당, 기자 활동을 한 아내 강씨 역시 남편이 계획하던 ‘알바 노동자 100인 인터뷰집’을 대신 쓰기로 했다.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연구교수로 일하는 권씨의 첫째누나 은혜씨(40)는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생각이 운동이 되고 결국 큰 변화를 만들어내더라. 동생이 하고자 했던 얘기를 기억하는 것이야말로 성실한 애도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권씨가 불을 지핀, 최저임금 1만원 인상 운동은 확산되고 있다. 6월8일 ‘최저임금 1만원위원회’가 출범했고 서울 학동역 서울세관 최저임금위원회 앞에서 캠프 농성도 시작됐다. 6월27일 결정되는 최저임금을 두고 현재 노동계는 5910원으로의 인상을, 경총은 동결을 주장한다. 권씨를 대신해 1만원위원회 대변인을 맡은 이혜정씨(29)는 “권문석 대변인은 빛나지 않는 곳에서 더 나은 세상을 고민했던 ‘투명인간’이었다. 그의 발자취를 더 많은 사람이 기억해줬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강서희씨 제공〈/font〉〈/div〉고 권문석 알바연대 대변인(35) 모습.
ⓒ강서희씨 제공 고 권문석 알바연대 대변인(35) 모습.


유족과 동료들은 6월3일 영결식을 치렀다. 시신은 경기도 벽제 서울시립승화원에서 화장했다. 그의 유골은 지난해 4월 강씨와 남편, 딸 도연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여행을 떠났던 산에 뿌려졌다.


 

기자명 전혜원 기자 다른기사 보기 won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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