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승우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운영위원은 지난해 우연히 한 ‘전설의 협동조합’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1978년 부산에서 처음 만들어졌고, 나중에 서울·광주 등 전국 8개 지역으로 번져나간 협동조합. 바로 양서(良書)협동조합이다.

양서협동조합은 양서의 유통을 목적으로 만든 소비자 협동조합으로 조합원 교육, 소모임, 공개 강연 등을 통해 대중을 교육하는 성격도 띤다. 가장 먼저 출범한 부산 양서협동조합은 협동서점을 만들어 책을 판매했고, 강만길·이이화·리영희 같은 당대 지식인을 초청해 강연회를 열었다. 창립총회에서 의결한 정관은 양서협동조합을 이렇게 규정했다. “조합은 양서를 적정한 가격으로 구입해 보급하고, 지역사회 개발 사업을 통해 부산 지방의 문화 향상을 도모하며, 조합원 상호 간의 협동과 신뢰에 기초한 민주적 경영 방식을 익히고, 나아가 경제적 민주주의와 협동주의에 입각한 참다운 자주, 자립적 경제 질서의 전 사회적 확산을 그 목적으로 한다.” 책을 통해 사회를 바꾸자는 문화운동적 성격이 강했다. 당시 〈부산일보〉가 ‘향도 부산에 문화운동의 바람이 분다’고 이 협동조합을 소개하기도 했다.

ⓒ시사IN 조남진하승우 운영위원(뒷줄 맨 오른쪽) 등 땡땡책협동조합 준비 모임 회원들이 6월4일 독서 모임을 가졌다.
처음 107명으로 시작한 조합원 수는 1978년 말에 298명으로 늘었다. 서점을 설립했고, 나아가 출판사·도서관·연구소·협동대학까지 세울 계획을 마련했다. 하지만 이 협동조합은 1년6개월 만에 문을 닫아야 했다. 많은 조합원이 민주화운동에 관여하던 터라 군사정권은 이 협동조합을 부마항쟁의 배후 조종 세력으로 인식했다. 결국 계엄사령부가 강제로 협동조합을 해산하도록 만들었다. 전국 8개 지역에 있던 다른 양서협동조합도 비슷한 경로를 거쳐 해산했다. 꽤 주목받았던 협동조합의 흔적은 지금도 남아 있다. 가령 독서운동단체인 사단법인 어린이도서연구회 같은 경우 당시 서울양서협동조합의 한 소모임에서 출발했는데, 양서협동조합이 해산한 이후에도 모임을 유지하고 확대하며 활동을 이어왔다.

하승우 위원은 35년 전의 협동조합에서 힌트를 얻었다. 함께 책을 읽고 지역사회에 관심을 두는 협동조합을 궁리했다. 올해 4월부터 이 활동에 호기심을 가진 이들이 모였다. 현재 오프라인에서 주도적으로 참여 중인 이들은 30여 명. ‘땡땡책협동조합’ 준비 모임을 꾸렸다.

“조합을 만드는 과정이 교육 과정이고, 훈련 과정이다. 이 협동조합을 통해 우리가 어떤 삶을 살 것인지 고민하자는 것이고, 결사체로서 협동조합의 뜻을 모아가는 과정이 중요하다. 그게 없다면 굳이 협동조합을 만들 이유가 없다.” 준비 모임은 4월부터 여러 차례 학습을 해왔다. 4월에는 어떤 협동조합을 만들 것인지, 과거 양서협동조합 사례를 공부했다. 5월에는 협동조합 일반에 대해, 6월에는 출판 영역에 대해 함께 공부하기로 했다. 7월과 8월에는 정관을 만드는 작업을 할 계획이다.

독서 모임과 출판사 간에 ‘도서 직거래’도 궁리

땡땡책협동조합 준비 모임은 새로운 출판 유통구조를 만드는 일에 관심을 두었다. 소형 출판사들은 ‘대형 서점이 낮은 공급률을 강요한다’며 출판 시장이 불합리하다고 지적한다. 독자들은 베스트셀러 목록에 휘둘리며 ‘수동적 독서’를 하기 십상이다. 베스트셀러 의존도가 높다 보니 ‘사재기’ 현상 같은 구태가 여전하다. 농산물을 직거래하는 것처럼 각 독서 모임이 출판사와 ‘도서 직거래’를 하는 게 시작이다. 봄날의책, 교육공동체 벗, 메멘토 등 협동조합에 관심이 많은 ‘친구 출판사’를 선정해 협력하는 방안도 궁리 중이다.

전자책 협동조합인 롤링다이스(위)는 8명이 100만원씩 출자해 만들었다.
인문·사회과학 독서 시장을 키우자는 목적도 있다. 하승우 위원은 “동네에서 주부들과 함께 사회과학 강독회를 하는데 호응이 좋다”라고 말했다. 독서 모임을 하면서 1년에 공동으로 구입한 책이 대략 250권. 그런 모임이 100개가 만들어지면 1년에 2만5000권을 소화하는 게 가능하고, 그만큼 인문사회과학 시장을 넓힐 수 있다는 것이다.

땡땡책협동조합은 독서가 기본이다. 혼자 읽는 게 기본인 독서를 여럿이 같이 읽는 사회적 행위로 바꾸어보자고 한다. ‘책’을 매개로 한 ‘관계’를 고민한다. 조합원이 주문한 책을 개별 배송하지 않고 몇 권을 묶어 한곳으로 배달하는 ‘반 공급’을 ‘부활’하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예전에 생협에 물품을 ‘반 공급’한 적이 있었는데, 식품은 부패할 염려가 있어서 대개 개별 공급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하승우 위원은 “거점 공간(북카페나 커뮤니티 카페)을 만들고 그곳에서 책을 받아가는 방식은 그 자체로 사람들이 만나는 접촉면을 넓힐 수 있고, 그 거점을 중심으로 동네 커뮤니티를 활성화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땡땡책협동조합은 열린 협동조합이다. 이름부터 좋은 책, 양서라는 표현을 쓸까 하다가 ‘좋은 책’ 또한 읽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것이니까 독자 조합원들이 다양하게 평가하도록  땡땡(○○)으로 남겨두었다. 모임에 참여하는 전유미 조합원은 “독서를 매개로 자연스레 지역사회와 더 큰 사회에 대한 관심을 넓혀가는 것, 협동운동으로서의 가치와 지향을 중요하게 여긴다”라고 말했다. 장기적으로는 50~100쪽짜리 팸플릿 제작을 계획하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꼭 상업적 용도가 아니더라도 중요한 사회 이슈를 신속하게 정리해 공유할 수 있다는 장점을 최대한 살리고 싶어서다. 조합원 가운데 출판 일을 하는 이들이 많아 실현 가능성이 높다.

“돈의 압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실험하고파”

‘롤링다이스’도 독서 모임에서 출발한 전자책 협동조합이다. 2009년 한 출판사가 주최한 철학 세미나에 참가했던 멤버들이 중심이 되었다. 3개월짜리 세미나를 마친 후 모임이 끝나는 게 못내 아쉬웠던 멤버들이 계속 정치·경제·협동조합 공부를 이어갔다. 누군가 제안했다. ‘우리 함께 공부만 할 게 아니라 협동조합의 정신 아래 같이 삶과 노동을 나누자. 우리만의 길을 실험해보자.’

2012년 5월30일. 8명이 롤링다이스를 세우겠다고 힘을 모았다. 100만원씩 출자했다. 각자 본업이 따로 있는 이들이 택한 게 ‘전자책 출판’이었다. 전자책 전용 도서만 출판한다. 제현주 공동대표는 “종이책을 낼 경우 권당 1000만원 이상 비용이 들어가다 보니 돈 까먹는 것에 구애를 받을 것 같았고, 상업성을 고려하다 보면 재미가 없어질 듯했다. 돈의 압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실험해보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출판 쪽이나 웹서비스·디자인 분야에서 일하는 조합원들이 있어서 그들의 노동으로 전자책 제작 비용을 줄일 수 있다는 점도 고려했다. 전자책을 내고 나면 세미나와 포럼을 조직해 ‘지식 나눔 행사’도 벌인다.

롤링다이스가 내려는 전자책은 ‘문턱 낮은 책’이다. 출퇴근할 때 등 토막 시간에 스마트폰으로 저렴한 비용에 내려받아 읽을 수 있는 책을 만든다. 그동안 전자책 7권을 냈다. 일반인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인문·사회과학 도서다. 분량은 일반 종이책의 4분의 1 정도로 간소화했고, 건강서 같은 실용서도 펴낸다. 지금 준비하는 책도 ‘골목시장 식도락 투어’다. 전통시장을 홍보하는 사회적 기업 ‘조각보’에서 콘텐츠를 제공하기로 했다. 아이쿱(icoop)생협, 한살림 등 생협에서 나오는 출판물을 전자책으로 만드는 일도 대행한다. 제현주 공동대표는 “상업적 목적으로 종이책을 내기 어려운 경우라도 조합원들이 보기에 의미가 있는 이야기라고 합의만 되면 출간한다”라고 말했다.

롤링다이스는 ‘합의’를 중요하게 여긴다. 신규 조합원은 기존 조합원이 추천하고 전원이 동의해야 가입할 수 있다. 또 본업이 있는 경우에도 롤링다이스의 일을 도와야 하고, 무엇보다 격주로 열리는 롤링다이스 세미나에 참가해야 한다. 함께 공부하지 않고서는 뜻을 나눌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제현주 공동대표는 “협동조합을 통해 무엇을 구현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돈을 벌기 위해서? 좋은 책을 펴내기 위해서? 콘텐츠에 담은 메시지를 중요하게 여겨서? 서로 토론하고 합의해가는 과정이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다행히 2년 넘게 세미나를 통해 토론하는 과정을 거친 터라 롤링다이스 조합원들은 서로 다른 의견을 주고받고 조율하는 데 익숙하다. 토론과 소통을 통해 사회적 가치를 찾아가는 과정. 그렇게 의미도 있고, 재미도 있는 과정. 그게 제현주 롤링다이스 공동대표가 생각하는 출판 협동조합이다.

기자명 차형석 기자 다른기사 보기 ch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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