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추 몇 살이에요?” 음성 변조를 거친 새된 목소리에 그만 웃음이 터졌다. 얼마 전 텔레비전 아침 뉴스에서 서비스직 종사자의 ‘감정노동’에 관해 리포트를 하다 사례로 든 저 황당한 질문은 120 다산콜센터 상담원에게 걸려온 실제 통화 내용이다. 실없는 웃음을 거두고 나니 저런 작자의 목소리를 굳이 변조해줘야 할 필요가 있을까 싶어 부아가 치민다. 감정노동자들의 고충을 다뤘던 뉴스 꼭지들은 대개 황당한 질문이나 폭력적인 언사, 언어 성폭력 사례들을 채집해 보여준다. 그리고 보여주는 대로 착실하게 반응하는 나도 ‘저런 ××를 봤나’ 정도의 욕을 보태곤 한다. 몰상식한 인간의 모습과 자신을 비교하며 태도를 가다듬거나, 나는 저런 사람이 아니라는 가벼운 교만을 즐기다 ‘세상엔 별 사람이 다 있네’로 마무리하는 식의 반복. 뉴스의 어떤 부분을 오락으로 소비하는 평범한 사람의 자리에서, 강한 인상이 남는 것은 전화를 응대하는 쪽보다 ‘이상한 사람’ 쪽이었다.

ⓒSBS 화면 캡처<가면 뒤의 눈물>에 나온 콜센터 상담원의 시위. 욕설 전화를 끊겠다고 말해 징계당했다.
물론 뉴스에서 보여준 사례들은 팩트다. 그러나 해당 꼭지가 방영되는 시점의 취재와 정보를 보태지 않은 뉴스는 해프닝을 전시하기 위해 서비스 업종에서 일하는 감정노동자들을 이용한 셈이 된다. 전문가의 인터뷰를 싣고,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유의 멘트로 마무리해봤자 현재형 정보가 부실한 뉴스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유럽의 경우 감정노동으로 입은 피해도 산재로 인정하지만 우린 아직 먼 나라 얘기입니다”라고 리포트했던 5월10일자 MBC 〈뉴스데스크〉처럼, 우리 현실을 외국에 비교해 ‘먼 나라 이야기’라 눙치며 시기상조의 뉘앙스를 조장하는 건 가장 나쁜 경우다. 어떤 문명사회가 찾아온다 해도 일정 비율로 존재할 ‘이상한 사람들’을 보여주는 데 치중하는 뉴스 속에서 관련 이슈가 터질 때마다 불려나오는 감정노동자들은 그 비율을 감당하는 또 다른 비율로 거듭 소비된다.

혼자 ‘진상’ 고객 감당하지 않도록 해야

감정노동은 르포나 다큐멘터리 형식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에도 심심찮게 등장하는 이슈였다. 2005년 8월 KBS 〈취재파일 4321(현 〈취재파일 K〉)-감정노동을 아시나요?〉에서는 서비스 산업 경쟁력 강화 과정에서 불거진 문제의 해결 방안을 모색했고, 2006년 8월 방영된 SBS 〈그것이 알고 싶다-웃다가 병든 사람들, 감정노동을 아십니까?〉는 서비스직 종사자들이 겪는 대인기피증과 우울증, 공황장애 등의 실태를 고발했다. 2009년 3월 방영된 MBC 〈시사매거진 2580-안녕하십니까, 고객님?〉에서 자신을 ‘총알받이’ ‘샌드백’으로 표현했던 한 콜센터 상담원은 “(상담원은 기업으로 향할) 고객의 분노를 한 번 막아주는 거죠”라고 말했다. 이들에게 모욕적인 언사를 퍼붓는 사람들이 일부라고 치부되는 사이, 상담원들이 기업과 소비자 사이를 완충하는 기능을 떠맡았던 것은 잊혔다. 주로 불편이나 불만을 해결하기 위한 절차로 전화를 거는 사람들의 부정적인 감정을 상시 맞닥뜨리는 콜센터 상담원들. 입에 담기 힘들 정도의 험한 말을 퍼붓는 ‘이상한 사람들’을 제외하고도 그들의 감정노동은 일상이다.

백화점 쇼핑을 가면 가까이 따라붙는 점원이 불쾌하고, 아침 10시부터 전화를 돌려대며 대출이나 보험, 휴대전화 교체를 권하는 상담원의 전화를 매몰차게 끊던 나의 일상과 감정노동자 간의 거리를 좁힌 것은 EBS 〈지식채널 e〉 ‘감정, 노동자’ 편이었다. ‘고객님’에게 암보험을 권유하는 상담원의 익숙한 목소리로 시작하는 5분 남짓의 짧은 영상에 ‘이상한 사람들’의 흉한 고성은 들리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욕 안 듣고 대화를 계속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점잖게 거절당할까’ 마음을 졸이는 상담원들은 당연하게도, 전화 줄에 생계를 건다. 가능하면 지금 바쁘다고 하거나 모르는 번호가 뜨면 받지 않고 통화 종료를 누르고 있지만, 통화 시간까지 실적으로 체크당하는 쪽을 생각하면 심란하기 짝이 없다. 도움이 필요 없다는 의미로 이어폰을 끼고 있는데도 무언가를 설명하려 애쓰는 판매원에게는 웃으며 목례하지만 서비스업계의 과도하고 융통성 없는 친절 매뉴얼에는 짜증이 솟는다.

6월9일 일요일 밤 방송된 〈SBS 스페셜-가면 뒤의 눈물〉은 일단 사과부터 하게 하고 죄송하다고 말하도록 강요하는 기업의 친절 정책이 부채질하고 확산시킨 ‘진상’ 고객의 힘자랑이 다시 불안정한 고용에 놓여 있는 서비스직 노동자를 향하는 구조를 짚는다. 일의 보람은 물론 자신의 건강을 해치는 종류의 인내도 과연 그들의 몫이어야 할까? 거의 모든 프로그램에서 ‘인내’를 서비스 업종의 천형처럼 다뤘던 것을 기억하면 〈가면 뒤의 눈물〉은 이제야 간신히 ‘방어권’에 관해 말하기 시작했다. 기내식 시비부터 성희롱까지 온갖 억지를 부리는 승객을 대처하는 항공 승무원을 대상으로 한 심리실험에서 승무원 혼자 응대하는 실험군에 비해 같은 상황에서 중간 관리자인 매니저가 중재를 도운 실험군은 매니저 개입 시점부터 스트레스 수치가 떨어지는 결과를 얻었다. 서비스직 노동자가 ‘진상’ 고객의 감정을 받아내는 상황을 혼자 감당하지 않도록 하는 것. 욕설 전화 등에 상담원이 먼저 끊을 수 있도록 매뉴얼을 만들고 시행하는 것은 감정노동자들이 자기 인격과 감정을 방어할 수 있는 기본적인 권리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공기업 콜센터 하청업체에서 파견직으로 일하던 상담원이 “고객님 계속 욕하시면 먼저 끊겠습니다”라고 대처한 것에 대해 반성 각서와 징계성 재교육을 요구하는 회사 측에 항의하다 재계약에서 탈락한 사례도 엄연하다. 이것이 그저 ‘이상한 사람들’을 비난하고 그칠 문제일까? 조직적으로, 아웃소싱된 부조리에도 눈을 돌릴 차례다.

기자명 유선주 (TV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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