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10일 오후 2시30분, 서울 연희동 95-4번지. 전두환 전 대통령이 사는 집 앞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이 울려 퍼졌다. “내 자식 살려내라”라는 절규도 터져나왔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유족들과 시민사회단체 관계자 120여 명이 관광버스 두 대에 나눠 타고 서울로 왔다. 1995년 5.18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러 상경투쟁을 한 지 18년 만이다. 18년 전 50대, 60대였던 유족들은 이제 70대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었다. 이들은 손에 든 태극기를 흔들며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로 시작하는 ‘임을 위한 행진곡’을 목청 높여 불렀다. 보훈처가 5·18 기념곡으로 지정하지 않으려고 했던 바로 그 노래다.

ⓒ시사IN 신선영김점례씨(가운데)도 쇳소리가 나게 목청껏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김점례씨(77)도 쇳소리가 나게 목청껏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33년 전, 김씨는 첫째 아들 장재철씨(당시 24세)의 시신을 알아보지 못했다. 아들 장씨가 1980년 5월23일 도청에서 공수부대의 총에 눈을 맞아 얼굴 한쪽이 아예 사라졌기 때문이다. 눈 외에도 어깨, 가슴, 무릎에 총을 맞았다. “애를 찾으러 도청을 싸돌아다녔는디, 아이고 아그들이 그냥 세 줄로 놓여 있더라고. 가운데 줄에 놓인 애를 보니 얼굴이 한 짝 없는 거여. ‘넌 어째 하필이면 얼굴을 맞앗쓰까나’ 했는디, 나중에 그게 우리 아들이라는 거여. 환장할 노릇이제.”

ⓒ시사IN 조남진김점례씨는 전 전 대통령이 그려진 피켓을 신고 있던 흰색 운동화로 수차례 내리쳤다.

세월이 흘렀지만, 그때 그 순간을 떠올리는 할머니의 목소리는 떨렸고, 눈가가 붉어졌다. 그때 김씨는 자신의 아들임을 확인하자마자 혼절했다. 그래도 마지막 가는 길은 깨끗하게 보내주고 싶었다. 재철씨 옷을 벗기고 알코올로 목욕을 시켜주었다. 도청 앞 상무관에 안치된 시신은 부패해서 벌레가 기어 나왔다. “(살아 있으면) 지금쯤 쉰일곱 살이겠지. ‘우리 엄니는 어찌 나도 몰라본다요’라고 했을 건디….”
그는 이날 전두환 전 대통령의 연희동 자택 앞에서 신고 있던 운동화를 벗어 전 전 대통령이 그려진 피켓을 수차례 내리쳤다. “너도 자식 귀하지. 우리 자식도 귀해.”

김씨는 결혼해 아들 셋과 딸 둘을 낳았다. 남편은 오래 병상에 누워 있었다. 김씨가 광주 대인시장에서 생선 장사를 하며 5남매를 키웠다. 남편은 앓아누운 지 12년째 되던 해 아들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숨을 거뒀다. “이번에 방송에서 엉뚱한 소리들이 나오니까 가슴이 아파서… 정신이 없어 죽겠더라고. 요즘은 분해서 잠도 못 자. 그리고 세상에 홍어가 뭐여. 홍어가. 관을 택배로 비유하고. 도대체 그것이 말이여 막걸리여, 아직도 가심에 자식을 묻은 사람들이 숱한디 그렇게 말을 해야 쓰겄어?” 〈TV조선〉이나 〈채널A〉의 ‘북한 개입설’이니 극우 사이트 일간베스트 저장소에서 나돈다는 5·18 폄훼 내용을 보고, 마흔이 넘은 ‘막둥이’가 참으라고 했지만 김씨는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서울까지 올라왔다.

김씨 등 5·18 유족들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집을 찾기 앞서 〈TV 조선〉과 〈채널 A〉를 항의방문했다.  이웅환씨(85)는 5․18 당시 21살이던 셋째 아들 강수씨를 잃었다. 강수씨는 5월27일 광주가 진압되던 날, 전남도청에 남아 있었다. 강수씨의 쌍둥이 동생 강준씨도 그때 얼굴에 총을 맞아 부상을 입었다. “일주일 뒤 법원에서 연락이 와 사망자 확인을 하러 가 보니까 피부가 삭고 거의 뼈만 남아 있었어.” 이씨는 그때 일을 회상하며 잠시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이날 〈채널A〉와 〈TV조선〉을 항의 방문한 5.18 단체 회원들은 “5.18 역사왜곡 종편언론 취소하라”라는 구호를 외치며 각각 채널A와 조선일보 사옥에 달걀 수십 개와 물병을 던졌다. 이 과정에서 조선일보사 앞을 막아선 전경들과 회원들 사이에 몸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날 유족들은 국가보훈처 항의방문을 끝으로 18년만의 ‘상경투쟁’을 마쳤다. 다시 빛고을 광주로 돌아가는 버스에 오르며 김점례씨는 “자식은 죽으믄 이 가심에 묻는다고 하제. 그게 빈말이 아녀. 빌어먹을 놈의 시상, 왜 또 이 가심을 후벼파냐고. 빌어먹을 세상”이라고 거듭 되뇌었다.

기자명 전혜원 기자 다른기사 보기 won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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