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에도 시대의 괴담집 〈미미부쿠로(耳袋〉)는 ‘귀로 들은 이야기를 담은 주머니’라는 뜻으로 세간에 떠도는 무서운 이야기를 모은 책이다. 1990년대에는 당대의 도시 괴담을 모은 괴담집 〈신(新)미미부쿠로〉가 대단한 인기를 끌어 드라마와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위성채널에서 만든 드라마 〈신미미부쿠로〉는 짧게는 1분부터 길어도 약 5분 정도 분량으로 프로그램 사이에 광고처럼 방영되었다. 한국에서도 인터넷에 떠도는 괴담을 모은 〈어느 날 갑자기〉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무서운 이야기’는 길다고 좋은 게 아니다. 길을 가다가 귀신을 만나 무작정 도망친 이야기나 어린 시절 기억에 남는 어렴풋하고 기이한 체험만으로도 충분하다. 논리와 기승전결도 필요 없다. 특정한 상황의 짜릿함만 있으면 된다. 그게 더 좋을 수도 있다. 개인의 기이한 체험이란 건 원인과 결과를 알 수 없는 경우가 태반이니까. 빨간 마스크나 홍콩 할아버지처럼 그것들이 대체 무엇인지 수많은 근원이 떠돌지만 정확한 건 알 수 없다. 흘러다니며 자기증식을 하는 게 괴담이니까. 정체를 알 수 없는, 이해할 수 없는 무엇이 더욱 두려움을 자극한다. 공포영화에서 옴니버스 형식이 유난히 끌리는 건 그런 이유다. 전체를 관통하는 무엇이 없어도 좋다. 단지 ‘공포’라는 이유만으로 단편들을 묶어놓아도 제구실을 한다. 논리보다는 감각이 중요한 장르이니까.
 


지난해에 이어 만들어진 〈무서운 이야기 2〉는 보험회사에서 미심쩍은 사건들을 되짚어보는 구성으로 되어 있다. 절벽에서 떨어져 죽은 두 친구의 이야기를 그린 〈절벽〉, 여행 갔다가 교통사고로 조난당한 세 여자의 이야기 〈사고〉, 한 남자가 다른 세계로 갔다가 도망쳐 나오는 〈탈출〉. 민규동 감독이 연출한 브리지 형식의 단편 〈444〉의 주인공인 보험회사 직원 남녀가 사건 파일을 들고 이야기를 시작하지만, 이 사건들을 고른 개연성은 보이지 않는다. 그 점에서는 1편에서, 남자가 잠들지 않도록 무서운 이야기를 해주는 여고생이라는 설정이 훨씬 그럴듯했다.

매 순간 관객의 기대를 뒤엎는 코믹호러

무서운 상황을 만들어내려고 뒤죽박죽으로 이야기를 섞어놓은 〈절벽〉은 요령부득이고, 이미 수많은 영화나 소설에서 봤던 설정을 반복하는 〈사고〉는 식상하다. 하지만 〈탈출〉은 재기가 넘친다. 정범식 감독이 ‘개병맛 코믹호러판타지’라고 말하는 〈탈출〉은 호러보다 코미디에 초점을 맞춘다. ‘병맛(맥락 없고 형편없음)’에 지질한 교육 실습생 ‘고병신’이 여고에 간 첫날 망신을 당하고 자살을 기도한다. 그걸 본 ‘흑마술사’ 여고생 ‘사탄희’는 딴 세상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다. 하지만 고병신이 도착한 세계는 이곳보다 끔찍하고 기괴한 곳이었다. 사탄희는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는 괴상한 방법을 알려준다. 고병신과 사탄희라는 이름이 말해주듯 〈탈출〉은 이른바 ‘병맛’이라 불리는 젊은 세대의 유머 코드가 지배하는 작품이다.

경성의 병원을 무대로 한 공포영화 〈기담〉과 〈무서운 이야기〉 1편에서 전래동화와 노동 문제를 연결한 〈해와 달〉을 만든 정범식 감독의 〈탈출〉은 전작들과는 다른 결을 보여준다. 전작에서 섬세하게 인물의 내면을 파고들었다면, 〈탈출〉에서는 오로지 괴이한 상황에만 열중한다. 무섭지는 않지만 효과적이다. 그래도 상관없다. 〈탈출〉의 장점은 공포가 아니라 ‘병맛’이다. 매 순간 관객의 기대나 예측을 뒤엎으면서 지질한 상황으로만 질주하는 영화. 장식적이라는 점은 동일하지만, 공포의 분위기만 끌어내며 좌초했던 전작들에 비해 〈탈출〉은 정범식에게 최적의 영화인 것 같다. 과잉으로 가득해도 ‘병맛’은 그 모든 것을 포용한다.

기자명 김봉석 (영화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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