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색하지만 주최 측이 주문한 대로 내가 살아온 얘기부터 해보겠다. 지금 나는 한국사회적기업진흥원에서 사회적 기업이나 협동조합의 창업 등을 지원하는 업무를 맡고 있다. 젊은 시절부터 이쪽 일을 하다 보니 이렇게 공적 조직에까지 흘러오게 됐다.

나는 어쩌다 협동조합·사회적 기업과 관련된 일을 하며 살게 됐을까. 돌이켜보면 나 혼자 성찰한 결과 이런 길을 선택하게 됐던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강원도 원주 태생인) 내 주변에 이런 생각을 가진 분들이 우연히도 아주 많이 살았던 영향이 크다. 그러다 보니 세뇌됐던 것 같다(웃음).

ⓒ시사IN 조남진최혁진 본부장은 원주의료생협 전무이사, 원주협동조합운동협의회 이사를 지냈다.

내가 태어난 뒤 집안이 경제적으로 많이 어려웠다. 그 바람에 고모가 운영하던 고아원 한쪽에  단칸방을 얻어 가족 모두가 함께 살았다. 그때 고아원 아이들한테 많이 맞았다. 난 부모가 있는 데다 고모가 원장이었으니까. 그러다가도 딴 동네 애들이 날 괴롭히면 이 아이들이 또 우르르 몰려와 날 도와주곤 했다. 훔쳐온 것도 함께 나눠 먹고(웃음). 고아원 아이들과 함께 사는 5년 동안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 새삼 의문을 갖게 됐다. 이 아이들이 본래 거칠다. 기부자가 오면 그 앞에서 온갖 안쓰러운 표정을 짓다가도 돌아서는 순간 육두문자를 날리곤 한다. 이 아이들이 다른 환경을 만났다면 훨씬 인간적인 삶을 살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

그 뒤 어머니가 시장에서 식당을 하실 때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계속 가난했고, 당연히 주변에는 늘 가난한 사람이 많았다. 가난한 사람들이 본래 술 마시고 싸우고 별일 아닌 걸로 옥신각신하고, 그렇게 산다. 그러면서 잔정 또한 많다. 어려울 때는 서로 제 일처럼 돕는다. 그때 배웠다. 우리 사회 엘리트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이들은 가르침의 대상이 아니라는 걸.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밑바닥 사람들이 오히려 훨씬 더 잘 안다는 걸.

그때는 부동산 투기 광풍 때문에 갑자기 땅 부자가 된 사람도 주변에 간혹 있었다. 이런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비교하면서 어린 마음에 오기 비슷한 생각을 품게 됐던 것 같다. ‘땀 흘려 일한 사람들이 충분히 존중받고 인정받는 모델을 꼭 만들고 싶다’고. 사실 한때는 누구나 이런 생각을 갖는다. 그러나 나이 들며 속물이 되어간다.

그에 비해 나는 장일순 선생님을 만난 것이 인생의 첫 번째 행운이었다. 선생께서 가끔 어머니 식당에 식사를 하러 오셨는데, 고2였던 나를 불러 이런저런 얘기를 해주시곤 했다. 내가 땀 흘리는 사람들이 성공하는 모델을 만들고 싶다는 얘기를 했더니 선생께서 물으셨다. “그런 일을 하려면 사람들의 마음을 바꿔야 할 텐데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한참 대답을 못하다가 “제가 잘하면 되지 않을까요?” 했더니, 선생께서 “부처님은 49가지 얼굴이 있다”라는 말씀을 하셨다. 요지인즉 부처님은 도둑 눈에는 도둑으로, 선비 눈에는 선비로 보인다는 거다. 왜 그럴까. 도둑은 같은 도둑이 아니면 마음을 열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세 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다”

선생께서 궁극적으로 하고 싶었던 말씀은 ‘네가 사람들과 더불어 무슨 일인가 하고 싶으면 고고연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였던 것 같다. 선생께서는 세상에 세 부류의 사람이 있다는 말씀도 하셨다. 흙탕물이 흐르는 것을 보며 ‘언젠가는 맑아지겠지’ 관망하는 사람, 흙탕물이 멎게끔 댐을 세우는 사람, 그리고 흙탕물에 뛰어들어 물이 맑아질 때까지 함께 흐르는 사람. 선생은 세 번째 길을 택한 분이었다. 내게도 흙탕물에 함께 뛰어들라고 가르치신 것이다.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는 일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갖춰야 할 영성 내지 인간에 대한 태도를 그분을 통해 배울 수 있었다.

내 인생의 두 번째 행운은 일본 협동조합 사람들을 가까이서 접할 기회를 얻은 것이다. 대학 때부터 본격적으로 협동조합에 관심을 갖고 활동하던 중 방문하게 된 일본 에스코프는 조합원이 3만명 수준인데도 스스로를 아주 작은 협동조합이라고 칭했다. 일본에는 조합원이 50만명, 70만명 되는 협동조합도 많으니까. 그곳 야마구치 이사장이라는 분을 만나러 갔는데, 조합 사무실에 이사장실이 따로 없었다. 왜냐고 물었더니 “이사장은 이사와 조합을 대신해 비전을 제시하는 사람인데 이사장실에 박혀 있으면 협동조합이 망한다. 이사장은 늘 길 위에 있어야 한다”라고 답했다. 당혹스러웠다. 에스코프 정도 매출 규모를 지닌 중소기업 사장이라면 나름 폼나게 사장실을 꾸미고 살 거다. 그런데 야마구치 이사장은 관료적이고 권위적인 데가 전혀 없었다.

에스코프에 감귤을 공급하는 생산자 농민 얘기도 인상적이었다. 그이는 본래 일반 감귤 농사를 짓다 아내가 농약중독으로 쓰러지는 경험을 한 뒤 친환경 농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런데 농약 안 친 감귤이라는 게 겉모양이 워낙 울퉁불퉁하다 보니, 거리에서 확성기를 들고 외쳐봐도 아무도 사주는 사람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때 우연히 거리에서 마주친 이가 에스코프 전무였던 가와시마 씨였다. 자신의 사연에 관심을 갖는 전무에게 농민은 “앞으로 좋은 감귤을 골라 생협에 납품하겠다”라고 제안했다. 그랬더니 전무가 “그러면 못생긴 감귤은 어찌 되겠나. 가리지 말고 전량 납품해 달라”고 역제안했다는 것이다. 그 뒤 에스코프가 약속을 지키면서 농민은 안정을 찾았다. 그를 본 주변 이웃들도 친환경 감귤 농사로 돌아섰다. 그런데 몇 년 뒤 에스코프를 찾아간 농민들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고 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들은 에스코프 조합원이 감귤을 유독 좋아한다고 여겼다. 늘 생산량 전부를 수매해갔으니까. 그런데 알고 보니 가와시마 전무와 생협 회원들이 직접 노점에서 남은 감귤을 팔고 있었던 것이다. 생산자에게 부담을 지우지 않으려는 마음 씀씀이였다.

한국사회적기업진흥원이 운영하는 ‘사회적 기업가 아카데미’ 강연 모습.

가와시마 전무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자립이란 서로 기대어 크는 것”이라고. 요즘 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기업의 자립이 화두다. 그런데 자립이 과연 뭘까. 돌이켜보면 걷는 일에서부터 사고하고 말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나 혼자 이룬 일은 없다. 부모님, 친구들, 선생님, 이웃, 조상들…. 이 모두의 도움이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기업에서는 이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어주면서 사회·경제 시스템의 밸런스를 맞춰가는 것이 중요하다. 기업 활동의 결과 이익을 창출해도 그것을 우리끼리 나눠먹을 게 아니라 우리 도움이 필요한 새로운 조직과 공생하는 길을 만들어가야 한다.

6500명이 사망한 고베 대지진을 기억하실 거다. 지진 초기 다리·도로가 다 끊겨 정부도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때 해발 930m 로코산(六甲山)을 넘어 고베로 향한 것이 다른 지역의 협동조합 사람들이었다. 이들 조합원 수만 명이 회사에 휴가를 낸 채 자원봉사자로 고베에 가 건물 잔해에 깔린 사람들을 구하고 부상자를 보살폈던 것이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때도 지역 의사들이 방사능을 두려워하며 다른 곳으로 대피하는 와중에 의료생협 의사들은 앞 다투어 그 위험한 지역으로 뛰어들기를 자원했다. 사람을 중시하고 서로를 보살피면서 성장하는 문화. 나는 일본 협동조합의 이런 문화를 통해 조직이 성장하는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배울 수 있었다.

그런가 하면 몬드라곤 협동조합을 처음 만든 스페인의 호세 마리아 신부는 내게 이상과 현실을 조화시키는 법을 가르쳐준 인물이다. ‘사람이 하느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됐다면 마땅히 땀 흘려 일하면서 행복을 누려야 할 텐데 왜 우리 동네 청년들은 초등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하고 일자리도 없이 놀고 있을까.’ 이런 의문을 풀기 위해 신부는 주민들을 만나 몬드라곤에 기술학교가 왜 필요한지, 기업을 설립하는 게 왜 필요한지 설득하고 다녔다. 그 결과 최초로 탄생한 협동조합이 ‘울고’다. 전기난로 등을 주로 생산하는 공장이었다.

울고가 직원 300명 규모로 커지자 신부는 또 다른 결단을 내린다. 공장을 4개로 분할한 것이다. 완제품을 생산하던 공장을 조립·생산 라인 등으로 분할하면 더 많은 기업에 납품할 수 있다는 계산에서였다. 다시 이들 공장의 규모가 커지자 이번에는 더 큰 도박을 벌인다. 협동조합이 다음 단계로 나아가려면 반드시 은행이 필요하다며 사람들을 설득한 것이다. 반대가 너무 심하자 이사들의 서명을 위조해 금융업 인가를 받아내는 ‘사기’도 서슴지 않았다. 이것이 스페인 5대 은행에 드는 노동인민금고의 출발이다. 이런 마리아 신부의 전략적 판단이 있었기에 몬드라곤 협동조합은 오늘날 127개 협동조합을 거느리고 노동자 10만명을 고용한 협동조합 복합체로 성장할 수 있었다.

지난 60년간 노동자를 단 한 명도 해고하지 않았다는 몬드라곤의 기적 또한 이런 특유의 연계망 속에서 가능했다. 몬드라곤에서는 한 협동조합이 도산해도 다른 협동조합들이 보조하면서 5년간 기회를 준다. 이 기간 부도 난 기업의 노동자들은 해고를 당하는 대신 다른 협동조합에서 유사한 일자리를 얻게 된다. 그러니 5년 뒤 개선의 여지가 없어 해당 기업이 파산하게 될지라도 노동자들은 새롭게 정착할 수 있는 것이다.

비즈니스 모델 만들 사회적 기업가의 부족

내 고향 원주의 경우 선배들이 만들어놓은 협동조합의 토양이 잘 형성돼 있다. 그럼에도 글로벌 경쟁이 격해지는 오늘날에는 이런 작은 협동조합 모델들이 언제 경쟁력을 상실하고 무너질지 모른다. 작은 시장만 형성돼 있어도 대기업이 마구 밀고 들어오는 게 현실 아닌가. 그런 만큼 몬드라곤처럼 협동조합끼리 협업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여건이 나쁘지는 않다. 협동조합기본법도 만들어지고 사회적 기업을 지원하는 공적 체제도 다양하게 구축되어 있다. 지역사회에 자원도 널려 있다.

문제는 이렇게 개별화되어 있는 자원들을 재조합해 비즈니스 모델로 연결할 사회적 기업가가 너무도 부족하다는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우리의 교육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고 본다. 혼자 〈수학의 정석〉 보고 공부하는 한국 아이들보다 협동 수업을 받는 핀란드 아이들의 수학 성적이 왜 뛰어난지 성찰할 필요가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협동의 교육철학을 배우는 일 같다. 내가 공부한 성과물을 주변과 나누며 스스로 성장하고, 또 이로써 주변 사람들이 성장하는 것을 보며 기뻐할 수 있는 감성과 지적 역량을 지닌 존재로 아이들을 키워내는 것. 이것이 앞으로 우리 사회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갈 것이냐, 정체할 것이냐를 결정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일반 기업도 마찬가지다. 글로벌 시대가 되면서 지금은 상품이나 서비스에 큰 차이가 없다. 그렇다면 이제는 다른 사람과 감성적으로 커뮤니케이션하면서 자연스럽게 매력을 부각시키고 유대감을 이끌어내는 리더십이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물론 모든 사람이 사회적 기업을 할 필요는 없다. 세상에는 다양한 직업이 있다. 사회적 기업가가 있는가 하면 민간 기업가가 있고, 시장통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도 있다. 이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사회라는 시스템을 만들어간다. 다만 사회가 건강하기 위해서는 이들 모두가 균형을 이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관계를 맺는 방식 자체가 달라져야 한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그간 사회적 기업이나 협동조합이 성장시켜온 리더십이 그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정리·김은남 기자 ken@sisain.co.kr

기자명 최혁진 (한국사회적기업진흥원 사업운용본부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