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행복한 진로학교

①강도현-화려한 스펙을 버리고 골목을 누비다 
②고원형-스카우트 거절 후 찾아온 ‘아름다운 배움’ 
③윤태호-가지 않은 길에서 만난 만화 ‘미생’ 
④권장희-교사를 그만두고 게임중독 치유 전문가로!
⑤최혁진-그때부터 내 꿈은 협동조합이었다
⑥하종강-내게 ‘노동’은 노래였다
⑦김현수-정신과 의사, 대안학교 교장되다
⑧송인수-강은 곡선으로 흘러 아름답다

ⓒ시사IN 이명익
윤태호 작가(45·위)는 1988년 허영만 화백의 문하생으로 출발해 1993년 만화가로 정식 데뷔했다. 대표작으로 〈야후〉 〈이끼〉 등이 있으며, 현재 포털 사이트 다음에 〈미생〉을 연재 중이다.

내가 이 자리에 설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다. 나 자신 중학교 때부터 사교육(입시미술)을 받아왔다. 지금은 열두 살, 아홉 살짜리 두 아이를 키우는 아빠로서 (자식의) 사교육 걱정으로 점철된 사람이다. 그럼에도 ‘사교육걱정없는세상’에서 나를 부른 건 고졸 출신으로서 혼자 힘으로 나름 이뤄낸 성취가 있다고 보고, 그 과정을 얘기해달라는 뜻인 것 같다.

내가 만화를 처음 그린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때다. 담임 선생님이 내 그림 솜씨를 눈여겨보시고 학교 신문에 네 컷 만화를 연재해보라고 하셨다. 6학년 때 선생님은 아예 칠판 절반을 내주시면서 거기에 만화를 연재할 수 있게 해주셨다. 덕분에 어린 나이에 창작의 고통을 알았다. 집에 배달되던 〈소년 한국일보〉 만화를 베끼며 표절 경험도 일찌감치 쌓았다(웃음).

그러나 당시만 해도 만화가가 될 생각은 하지 못했다. 당시 풍토라는 게, 그림 좀 그린다 싶은 아이는 무조건 화가가 돼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중학교 때부터 입시 미술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수채화 그리는 걸로 학교 수업을 대신하곤 했다.

그런데 고1 때 집안이 쫄딱 망했다. 전북 군산에서 살던 집을 팔고 이사를 갔는데 목적지인 광주에 이를 때까지 머물 집을 구하지 못했을 정도였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어딘가로 애타게 전화를 하던 어머니 모습이 지금도 기억난다. 그래서 지원한 것이 장학금 많은 사범대학 미술교육과였다. 그런데 실기 시험 비율이 60%인 미대와 달리 미술교육과는 10%에 불과했다. 시험 치는 아이들을 보니 개중엔 샤프펜슬 잡듯 붓을 잡는 아이도 있었다. ‘아, 여기 다니려면 갑갑하겠구나’ 싶었는데 말 그대로 기우였다. 어차피 떨어졌으니까(웃음).

불합격 통보를 받은 날 집에 갔더니 아버지가 “너 재수해서 인문계 갈래? 난 널 미대 보낼 능력이 안 된다” 하셨다. 우리 아버지가 좀 거칠게 살아온 분이다. 식구 모두가 많이 두려워했다. 그런데 그 말을 듣는 순간 어찌나 화가 나던지 나도 모르게 “지금껏 내신 관리를 전혀 안 했는데 어떻게 인문계를 갑니까?”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고는 “만화가가 되겠다”라고 선언하듯 말했다. 아버지도 내 분력에 놀랐는지 “그럴래?”라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렇게 얼떨결에 만화가의 길로 접어들게 된 것이다(웃음).

당시는 〈만화광장〉이 인기였다. 허영만 선생이 〈오! 한강〉을 연재한 만화 잡지다. 여기서 만화가 지망생들을 모아 만화 학원을 운영한다는 얘길 듣고 무작정 상경했다. 낮에는 학원을 다니고 밤에는 인근 공원에서 노숙을 하면서 ‘하루빨리 만화가로 성공하고 싶다’는 욕망에 불탔다. 그러던 어느 날 바로 옆 동네에서 노숙하던 한 선배가 허영만 화실의 문하생들과 술을 마셨다는 얘길 해줬다. 귀가 번쩍 뜨였다. 그 문하생 연락처를 알려달라 했더니 전화번호는 잃어버렸고 화실이 서울 대치동 은마아파트라는 것만 기억한다고 했다. 그날부터 은마아파트 1동부터 31동까지 모든 집을 일일이 뒤졌다. 마지막 31동에 이르러 가까스로 화실을 찾을 수 있었다.

그날로 허영만 선생을 뵙고 문하생으로 받아줄 것을 간청했다. 처음엔 거절당했다. 빈자리가 있었는데 마침 내가 오기 전날 새 사람이 들어왔다고 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몇 번을 찾아간 결과 운 좋게 화실에 입성할 수 있었다. 문하생에도 단계가 있다. 사람머리 먹칠하는 사람부터 시작해 펜선 수정하는 수정맨, 배경 그리는 배경맨, 인물 그리는 터치맨 등등…. 한 단계씩 올라서는 데 1~5년 정도가 걸린다. 보통 서른 살은 넘어야 데생을 할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운 좋게도 스무 살 넘어 데생을 시작하고, 스물다섯이던 1993년에 만화가로 데뷔할 수 있었다. 당연히 꽤나 자만한 상태다.

“내 데뷔작은 쓰레기 같았다” 

데뷔작이 어땠냐고? 처절하게 실패했다. 한 출판사에서 아홉 번을 퇴짜 맞았다. 오기로 3개월 걸려 그린 24쪽짜리 만화를 다시 들고 갔는데 그것조차 퇴짜 맞았다. 지금의 〈미생〉보다 데생이 100배는 꼼꼼한 만화였다. 펜선 입히는 데만 사흘 밤을 새웠다. 자존심이 상해 경쟁 출판사로 그 작품을 들고 갔고, 결국 거기서 데뷔에 성공했다. 그런데 데뷔작이 실린 잡지를 사들고 다른 작가들의 작품부터 숙독하다 내 작품을 보니 나도 모르게 얼굴이 벌게지는 거다. 뭐랄까. 그림에는 어마어마하게 공을 들였는데, 그 그림이 담고 있는 얘기는 쓰레기 같달까? 아홉 번 퇴짜 맞은 작가의 아집, ‘이래도 나를 안 써줘?’라는 식의 자기과시… 뭐 그런 게 느껴졌다. 그 뒤 작품을 연재하는 4개월이 지옥 같았다. 너무 비참해 데뷔를 포기하고 다시 문하생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창작이란 무엇인가’를 처음부터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3학년 이래 나는 그림만 잘 그리면 모든 일이 잘 풀릴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림 그리는 데만 신경을 썼다. 만화가가 되겠다고 한 뒤로도 스토리 걱정은 하지 않았다. 소설이나 열심히 읽으면 스토리는 잘 쓰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때부터 집에 있는 만화책을 모두 버리고 글로 된 책을 무조건 필사하기 시작했다. 드라마 〈모래시계〉 대본, 최인호의 시나리오 전집 등을 모두 베껴 썼다. 사실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은 이미지를 다루는 데만 익숙해 글씨를 쓰려면 좀이 쑤시고 어딘가 아프다. 그래도 꾹 참고 필사를 계속했다. 일종의 자기 학대 과정이었다.

그러면서 창작자로서 개념 정립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하는 일이 그림을 그리는 거냐, 글을 쓰는 거냐, 아니면 통합적으로 새로운 걸 창작하는 거냐. 그러다 나름 도달한 것이 대중매체의 만화란 ‘익숙하게 다른 것’이라는 결론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새로운 것이 대중의 외면을 받듯 클리셰(진부하고 상투적인 표현)로 범벅된 작품 또한 외면을 받을 터였다. 그렇다면 익숙한 듯하면서도 나만의 결을 드러낼 수 있는 작품이어야 할 텐데 그것이 뭘까, 고민하다 주목하게 된 것이 캐릭터다.

흔히 작품을 쓸 때 플롯(구성)을 중시하는 분들이 많다. 그렇지만 플롯은 시나리오 작법서나 이론서에 다 정리돼 있다. 나는 그보다는 캐릭터에 마음이 끌렸다. 이를테면 창밖에서 두 사람이 치고받고 있다 치자. 우리 모두 신기하게 싸움을 구경할 뿐, 그 일로 고통을 받지는 않는다. 왜? 모르는 사람이니까. 그런데 만약 내가 버스를 타고 낯선 곳을 가고 있는데 창밖으로 우리 아이 모습이 보인다면? ‘왜 우리 애가 저런 위험한 곳에 혼자 있는 거지? 빨리 내려 구해야 할 텐데…’ 하면서 온갖 불안과 공포가 엄습할 것이다. 나는 만화 캐릭터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만든 캐릭터에 대해 독자가 많이 알고 이해할수록 같이 울고 웃고 공감하지 않겠나.

실제로 작품을 그릴 때 나는 플롯은 전혀 짜놓지 않는다. 대신 캐릭터를 꼼꼼히 정리해둔다. 최연장자에서 연소자까지 등장인물 차트를 만들고,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있던 해에 이 사람은 몇 살이었는지 환산해둔다. 이를테면 88올림픽이 열렸을 때 40대 중반으로 보수 신문의 정치부장이던 사람과 20대 대학생이던 사람이 그 시절을 회상하는 정서는 당연히 다를 것 아닌가. 이렇게 과거의 사건들이 쌓이면서 그 사람의 캐릭터가 만들어진다. 대사·단어·말투가 다 달라진다.

캐릭터에 관심을 가지면서 주변을 새삼 둘러보게 됐다. 내 주변 친구, 선생님, 이웃들에게 나와 닮은 부분이 보였다. 그러면서 깨닫게 됐다. ‘아, 세상 만인의 모습이 바로 내 안에 있구나.’ 사춘기 때부터 나는 나 자신이 불쌍했다. 나조차 나를 외면해버리면 진짜 불쌍한 사람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늘 자기 연민을 지니고 살았던 것 같다. 실의에 빠졌을 때는 내가 나 자신을 위로하기도 하고…. 그런 경험들이 내 만화에 묻어나는 것 같다. 사람들도 나와 비슷하기에 대동소이한 지점에서 위로를 받는 듯하고.

‘아버지 일기’를 쓰기 시작하다 

나를 분석하는 작업도 창작에 도움이 됐다. 20대의 나는 비애감, 열패감, 낮은 자존감으로 똘똘 뭉쳐 있었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헌책방에 갔다가 〈한 정신과 의사의 실존적 자기분석〉이라는 책을 우연히 접했다. 외국 유학을 간 신경정신과 의사가 쓴 졸업 논문을 책으로 펴낸 것인데, 책을 보니 자기분석을 위해서는 자신의 아버지부터 분석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쓰기 시작한 것이 ‘아버지 일기’다. 그 전까지 아버지는 내게 ‘자식 상투를 쥐고 좌지우지하는 분’이었다. 그런데 일기를 쓰면서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을까’를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했다. 먼저 떠오른 것이 집에 있던 아버지 사진이다. 멋진 포즈를 잡고 찍은 젊은 아버지의 사진. 알고 보니 아버지는 연예인이 되고 싶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린 나이에 덜컥 아이를 가져버린 것이다. 남한테 자신을 화려하게 보이고 싶은 욕망을 지녔던 청년이 일찌감치 가장이 됐다. 그러니 아이 때문에 자기 인생이 피해를 봤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이 들면서 아버지가 가여워졌다. 울면서 일기를 썼다. 그 뒤로는 아버지가 무섭지 않았다. 지금도 고향 가면 삼 형제 중 유일하게 아버지와 술 한잔 할 수 있는 아들이 나다.

‘중2병 일기장’이라는 것도 써봤다. 왜 있잖나. 세상을 난도질하면서 자기가 가장 잘난 줄 아는 시기. 그 시기에 쓰던 어휘나 문장은 어른이 된 뒤로도 불현듯 튀어나온다. 창작자라면 이를 극복해야 한다는 생각에 늘 사전을 끼고 살았다. 인간의 운명적 속성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았다. 사주, 관상, 수상, 족상에서 별자리까지 다양한 공부를 해봤다. 그러다 보니 지구는 내가 잠시 스쳐가며 배우는 학교라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

어찌 보면 창작자는 자기 자신을 비추는 좋은 거울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남을 비출 게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수십 개의 생각의 결, 그중에서도 어느 결을 끄집어내느냐에 따라 인격이 달라진다. 그런 만큼 창작자는 자신을 끊임없이 돌아보면서 욕망을 관리할 줄 아는 존재여야 한다. 사실 만화를 그리는 작업 자체는 힘들고 고통스럽다. 때 되면 자고 때 되면 일어나는 생활을 해보는 게 소망이다. 그러나 만화를 통해 나를 깨닫고 나 자신에 대한 이미지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감사한다.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직업은 많지 않으니까.

어떤 분들은 묻는다. 창작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몇 년 전 예술영재 실기 심사를 갔다가 좌절한 일이 있다. 초등학교 2~3학년까지는 표현력도 풍부하고 대단한 그림을 그리던 아이들이 미술 학원에서 석고 데생, 붓 터치를 배우면서부터 그림을 재미없어한다는 게 확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래서는 오래가기 어렵다. 즐거움을 잃어버리면 재능을 꽃피우기 어렵다.

그뿐 아니다. 요즘 세종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첫 수업 때마다 하는 얘기가 있다. ‘너 스스로 각오하고 있느냐’라고. 창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일단 스스로의 욕망이 매우 커야 하고, 이를 구체화하기 위한 디테일한 지점까지 알고 있어야 한다. 한 예로 프로 바둑 기사를 꿈꾸는 아이들이 있는데, 정말 프로가 될 정도의 아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궁금한 수를 놓아보곤 한다. 이 정도로 몰입하는 아이라면 부모도 밀어줄 수밖에 없다. 어쩌면 그 길에서 내쳐져 부모나 아이나 상처를 입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선택은 온전히 본인 몫이다. 흔히 예체능 분야는 타고난 재능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를 하는데, 그 분야의 뭔가를 잘하는 것만이 재능은 아니다. 자신의 길을 가기 위해 가시밭길을 기꺼이 감수할 수 있는 의지 또한 재능이다.

만화가가 되기 위해 굳이 미술 학원에 다니거나 만화학과에 진학할 필요도 없다. 오히려 일반 대학에 들어가 교양을 쌓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결국 창작자란 뭐 하나에 특화된 사람이 아닌 총합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정리·김은남 기자 ken@sisain.co.kr

기자명 윤태호 (만화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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