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훈미래로 나아가지 못하는 정부, 보잘것없는 시청률로 막을 내린 〈왕과 나〉. 떠들썩하게 출발했지만 도대체 새로운 게 없었다. 영화든 세상이든 뻔한 스토리를 전혀 다른 스타일로 포장하는 형식적 완성의 힘이 필요하다.
유치원에 다니는 내 딸은 제 멋대로 말하기의 대가다. 인간이라는 게, 뭐라고 말을 하려면 그 말이 자기가 아는 말인지 일단은 생각해보고 하는 게 순리일 텐데, 딸은 그렇지 않다. 1~2년 전에는 같이 자전거를 타다 “아빠, 위험해요!”라는 말을 한다는 게 “아빠, 요염해요!”라고 소리치더니, 얼마 전 교회에 가서는 “하나님, 저 여자랑 결혼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한다. “뭐 여자? 아니지, 네가 여자니까 넌 남자랑 결혼해야지” 했지만, 순간 생각했다. 여자랑 결혼할 수도 있겠네 뭐. 그러고 보니 당시 “아빠, 요염해요!”도 혹시나 그애만의 비장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싶기도 했다. 내 딸의 말 중에 상당수는 틀렸지만, 또 그래서 상당수는 맞기도 하다. 우리에게 새로움이라는 것은 어쩌면 이런 과정을 통해 다가오는 게 아닐까.

한동안 수천 년 역사의 지구 문화계에 왜 그토록 많고도 많은 사랑 타령이 대세를 이루어왔는가 고민했던 적이 있다. 답은 명쾌했다. 사랑은, 이 얄궂은 녀석이 몇 개월짜리 호르몬 분비로 만들어진 건지 몰라도, 우리 삶의 본질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좋다 그래, 본질이라고 치자. 그럼 〈로미오와 줄리엣〉 하나로 만족하지 뭘 그리 별의별 사랑 놀음이 소설이고 영화고 드라마고 판을 치나. 답은 또 명쾌했다. 사랑의 감동이라는 게 매번 각기 다른 느낌으로 전해오기 때문이다.

그럼 또 하나의 질문이 생긴다. 매번 다른 느낌으로 전달되는 사랑의 새로움이라, 그게 대체 뭘까? 몇 달 전 리안 감독의 〈색, 계〉라는 영화가 개봉하던 즈음, 하도 여기저기서 난리를 부려 개봉 첫날 아침 극장으로 달려갔다. 내용? 뻔하다. 1940년대 초 친일파 핵심 인물 ‘이’(량차오웨이)를 침대 위에서 무너뜨려 암살하고자 했던 ‘왕치아즈’(탕웨이)의 운명적 사랑을 담은 이야기이다. 그러나 나는 이 영화의 도입부, 왕치아즈가 이의 부인 등과 마작을 하는 시퀀스에서 머리에 번쩍 벼락을 맞았다. 마작 패와 책상, 부인네들의 얼굴과 손가락, 뒷배경과 좁은 방을 이리저리 넘나드는 카메라 앵글은 단지 그 장면만으로도 이것이 세계 영화사의 걸작 중 한 편으로 남게 될 것임을 예감케 했다. 숨이 턱턱 막히는 그 기교는 그 자체로 이 영화가 그리는 기막힌 사랑 이야기의 동질적 감동으로 산화되고 있었다.

뻔해도 되는 사랑 이야기, 뻔하면 안 되는 사랑 스타일

난나 그림
여기저기서 대체 새로운 게 뭐냐는 한숨이 터져나오는 요즘이다. 대통령 취임 전부터 이것저것 개혁하겠다, 손다짐을 했던 정부는 앞선 미래로 나아가기보다 처진 시대의 그림자 속에 발을 빠뜨린 것 같고, 방영 초 새로운 이야기로 시청자들의 관심을 샀던 드라마 〈왕과 나〉는, 결국 그저 그런 명함도 못 내밀 시청률로 종영하고 말았다.

사랑 이야기? 뻔해도 된다. 하지만 그걸 표현하는 사랑 스타일? 뻔하면 안 된다. 영화 속 사랑이 저 앞 미래의 희망이고, 사랑의 감동이 세상 사는 힘과 동격이라면, 같은 노래라도 누구의 목소리냐에 따라 감동이 극과 극이다. 스토리는 뻔해도 그 스토리를 전혀 다른 스타일로 포장하는 놀라운 형식적 완성의 힘, 영화든 세상이든 그것이 필요하다. 상투적인 것과 전형적인 것은 매우 다르다. 가장 상투적인 것들로 만들어진 세상과 가장 전형적인 것들로 완성된 세상의 거대한 차이. 지금 우리 눈앞에 있어야 할 건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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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명 이지훈 (FILM2.0 편집위원·영화 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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