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상상을 해본다. 캄캄한 밤바다에 낡고 작은 조각배를 타고 떠 있는 상상. 파도가 점점 높아지는 상상. 배에 물이 들어오고 엔진까지 멈춰버리는 상상. 완전한 고독. 완전한 공포. 그리고 완전한 절망. 등대가 보인다. 하지만 너무 멀리 있다. 그때, 저 멀리 수평선 위에서 출렁이는 희미한 불빛 하나. 아마도 나와 같은 신세. 어쩌면 나보다 더 위태로운 조각배. 쉼 없이 요동치면서도 용케 제자리를 지키며 떠 있는 그 불빛을 선실 창문 너머로 지켜보는 상상을 해본다.

때로는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캄캄한 밤바다에 나처럼 가라앉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발버둥치는 조각배가 하나 더 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제법 위로가 되지 않을까. 선명한 등대는 아니지만 희미한 불빛으로나마 주변을 맴도는 존재, 서로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막 고맙고 미더운 존재. 스테파니에게 알리가 바로 그런 존재다.


두 사람은 나이트클럽에서 처음 만났다. 아마추어 복서 알리(마티아스 쇼에나에츠)는 경비원으로 일하고 있었고 범고래 조련사 스테파니(마리옹 코티아르)는 춤을 추러 왔다. 그러다 손님들 사이에 승강이가 벌어졌고 스테파니가 코피를 흘렸고 알리가 끼어들었다. 그녀를 집에 데려다 주는 차 안에서 치마 아래로 뻗은 미끈한 두 다리를 살짝 훔쳐보는 알리, 하지만 거기까지.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 연락처만 남겨둔 뒤 아무 일 없이 돌아섰다. 그로부터 꽤 여러 날이 흘렀다.

누나 집에 얹혀살면서 자기 앞가림 못하는 알리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스테파니다. 한번 만날 수 있겠냐고, 그녀가 먼저 물어본다. 근사한 로맨스를 기대하며 집에 찾아갔을 때 스테파니는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치마 아래로 뻗은 미끈한 두 다리. 그게 다 사라진 채로.

사고로 두 다리를 잃은 여자와 밑바닥 인생을 사는 복서의 당혹스러운 재회에서 영화 〈러스트 앤 본〉의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알리가 스테파니를 데리고 바다에 가는 다음 장면이, 말하자면 영화의 진짜 오프닝이다. 오직 두 팔에 의지해 헤엄치는 스테파니의 맨살 위로 눈부신 햇살이 쏟아지는 그 다음 다음 장면이 어쩌면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다. 그래, 내가 아직 살아 있어! 다시 헤엄칠 수 있어! 살아서 헤엄치는 나를 지켜봐줄 사람도 있어! 그날 그 바닷가에서 스테파니는 참 오랜만에 미소라는 걸 짓게 되었다.

밑바닥 복서와 사고당한 여자

장애를 극복한 지고지순한 사랑? 밑바닥 인생의 순정? 미안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하는 영화가 아니다. 내가 당신의 등대가 되겠어요, 하며 새끼손가락 걸고 굳게 맹세하는 연인의 로맨스를 들려주는 게 아니라, 나 가라앉지 않을 테니까 너도 가라앉지 마, 하며 다섯 손가락 말아쥐고 자신의 운명을 향해 각자의 주먹을 휘두르는 사람들의 섹스를 보여준다. 그로기 상태에서 허우적댈지언정 케이오는 당하지 않겠다는 남자. 두 다리를 잃었지만 나머지 육체는 아직 쓸 만하다는 데 짜릿한 희열을 느끼는 여자. 나와 함께 이 세상을 표류하고 있는, 하지만 조금 다른 종류의 두 불빛을 보면서 쉽게 죽지 않는다는 것의 비루함에 대해, 그래도 악착같이 살아남는다는 것의 숭고함에 대해 자꾸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다.

세상엔 연출을 잘하는 감독과 연출을 아주 잘하는 감독이 있다. 〈예언자〉의 감독 자크 오디아르가 후자다. 연기를 잘하는 배우와 정말 잘하는 배우가 있다. 〈라비앙 로즈〉의 배우 마리옹 코티아르가 후자다. 두 사람의 눈부신 재능과 재능이 부딪쳐 〈러스트 앤 본〉이라는 불꽃을 만들어냈다. 이 영화, 기막히게 아름답고 끝내주게 자극적이다.

기자명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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