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이상은의 13집
한국에서 열세 장의 앨범을 낸다는 건 경이에 가깝다. 가수의 생명이 갈수록 짧아지고, 그나마도 음악 활동을 이어갈 수 있는 여건이 점점 안 좋아지는 지금의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리고 13집쯤에 이르면, 원로 가수 대접받기 십상이다.

하지만 열세 번째 앨범 〈The 3rd Place〉를 발표한 이상은은 그렇지 않다. 1988년에 데뷔한 이상은은 20년 동안 나이를 먹지 않은 것 같다. 그렇게 보인다. 단순히 옛날에 했던 감성적 사랑 타령을 하면서 피터팬으로 머물러 있는 게 아니라, 나이를 초월한 존재처럼 느껴진다. 그건 그녀가 나이에 맞게 살거나, 나이를 부인하거나 하지 않고 그저 계속 이어지는 순간과 순간의 어느 지점에 충실하게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한창 열애 중일 때 만들었던 지난 앨범 〈로만토피아〉는 “그때 나에게 가장 절실했던 건 사랑이었다”는 그녀의 말처럼, 이상은의 어느 앨범보다 핑크빛이었다. “소재도 그렇고 느낌도 그렇고 자기 색깔을 가지고 상상한 걸 노래할 때 반응이 가장 좋다. 작품으로 거짓말하는 건 싫다. 진실했으면 좋겠다. 앨범 나오고 활동하면 1∼2년은 그것만 불러야 하는데 거짓말하면 그때마다 괴롭지 않을까.”

데뷔한 지 20년이 지난 지금, 이상은의 열세 번째 순간인 〈The 3rd Place〉는 일종의 결산이다. 그녀가 지금껏 그리고 말하고 불러왔던 세계의 지도다. 이상은은 말한다. “프로듀서를 맡은 와다 이즈미가 지금이 나에겐 중요한 시기라고 판단하고, 동료 뮤지션에게 물었더니 이런 답을 했다고 하더라. ‘서른일곱이면 새로운 걸 찾기보다는 그동안 해왔던 실험적 문법들을 정형화시켜서 도량형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니 네가 이제껏 만든 걸 돌아보고 그동안 해왔던 가장 안정감 있는 표현들을 생각해보라고 했다.”

도량형이란 한 국가가 기틀을 잡기 위한 필수적 단계다. 그동안 쌓여왔던 풍속은 도량형에 의해 정형화되고 질서가 된다. 그러나 도량형이라는 말의 무게에서 짐작할 수 있듯, 쉽지 않은 결산이었다. 이상은은 이 앨범의 작업을 끝내고 부모가 살고 있는 충주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20일을 앓다가 서울로 돌아왔다. 작업이 너무 고됐기 때문이다. 앨범 프로듀서를 맡은 와다 이즈미(〈공무도하가〉의 프로듀서이기도 하다)는 작업 기간 내내 한 치의 빈틈도 없이 그녀를 다뤘다. 그녀가 갖고 있는 것은 물론, 그녀가 아직 끄집어내지 못한 것들이 나올 때까지 계속 곡을 쓰고 노래를 하게 했다. “〈공무도하가〉를 만들고 너무 힘들어서 와다 이즈미하고는 결별했다. 그와 다시 하게 되면 죽을 것 같았다.”

〈공무도하가〉의 와다 이즈미와 작업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은이 거의 10년이 지나 다시 와다 이즈미를 불러들인 까닭은 더 큰 무엇을 만들어내기 위해서였다. “마음대로 곡을 썼더니 귀엽고 예쁘고 아기자기한 음악을 쓰고 있더라. 예를 들어 ‘돌고래 자리’ 같은.”

스튜디오 밖에는 태양과 바다가 펼쳐져 있는, 그야말로 “곡이 술술 나올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의 작업이었지만 완벽주의자 프로듀서는 그 환경을 마음껏 즐기는 대신, 그만한 결과물을 그녀로부터 뽑아냈다. 와다 이즈미뿐만 아니다. 〈The 3rd Place〉는 〈공무도하가〉 이래 그녀가 함께해온 음악 감독들이 모두 참가하고 있다. 〈공무도하가〉 이후 이상은의 음악적 파트너였던 다케다 하지무가 곡 작업을 같이했고 〈신비체험〉과 〈로만토피아〉에서 프로듀서를 맡았던 이병훈은 편곡에 참여했다. 그들과 함께한 〈The 3rd Place〉에 〈공무도하가〉 이후 그녀가 걸어왔던 음악적 여정과 이미지가 모두 녹아 있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시사IN 한향란이상은은 인생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상처와 치유, 바다의 기쁨과 대지의 고독을 노래한다.
〈공무도하가〉와 〈외롭고 웃긴 가게〉에서 느꼈던 음유시인의 사색, 〈Asian Prescription〉에서 〈Endless Lay〉에 이르는 치유의 여신, 〈신비체험〉 〈로만토피아〉의 밝았던 모습에 이르기까지 ‘담다디’의 선머슴 아이들 스타에서 아티스트로 성장한 이후 이상은이 밟아왔던 단계의 총집합이다. 장르는 다채롭고 사운드는 풍성하다. 희로애락의 모든 면이 옅게, 〈The 3rd Place〉를 채색한다. 풍부한 여백과 고른 밀도로···. 〈공무도하가〉 〈외롭고 웃긴 가게〉 이후 한동안 발 없는 새가 되어 하늘을 날아다녔던 이상은은 〈로만토피아〉에서 땅에 발을 딛더니 이제 땅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다. 아직 날지 못했던 하늘, 그리고 그동안 날아다녔던 하늘을.

앨범 제목인 ‘제3의 공간’은 ‘아직 날지 못했던 하늘’을 뜻한다.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제3의 공간’이라는 단어를 알게 됐다. 건축용어다. 제 1의 공간은 생존 공간이고 제2의 공간은 20세기까지 발전해온 생산의 공간이다. 21세기가 되면서 제3의 공간이 필요해진다고 하더라. 명상할 수 있고, 고차원적인 정신 활동을 할 수 있는 공간이라고 한다. 멋있었다. 인간은 그렇게 진화해야 하는 것 아닐까. 계속 음악을 하다보니 생계 수단처럼 되어가고 있고, 공연을 다녀도 예전에 느꼈던 예술로서의 감정이 점점 없어진다.” 제3의 공간으로서 음악을 생각하겠다는 말일 것이다.

이상은이 그동안 ‘날아다녔던 하늘’은 언어였다. 바람과 상처, 새와 여행 등 그동안 숱하게 그녀가 내뱉었던 단어들. 이상은 이후 하나의 클리셰(판에 박은 듯한 문구나 진부한 표현)가 되어버린 그 감성과 말들. 이상은은 말한다. “새로운 언어를 찾는 건 이 시대의 음악인들이 할 일이지만 나는 이제까지 그런 말에 진실했는가, 앞으로도 할 수 있는 말인가를 생각한다. 자기 클래식을 만드는 게 나에게 중요하다.”

이상은은 늘 여행을 다녔다. 앨범과 앨범 사이마다 세계를 떠돌며 음악을 만들고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썼다. 그래서 보헤미안이라는 수식어가 늘 그녀를 따라다닌다. 아티스트라는 단어와 함께. 스스로를 “여행을 좋아하는 오타쿠”라고 말하는 이상은은 계속 길 위를 걸어왔다. 앨범의 타이틀 곡 ‘삶은 여행’은 어쩌면 그녀의 오랜 좌우명이었을지도 모른다. 지금껏 거쳐왔던 여행지를 되돌아보며 이상은은 다시 일어나 영원을 향한 여행을 떠난다. 이곳도 아니고 저곳도 아닌 또 다른 곳으로. 흘러 흘러가며 원래 없었던 길을 이상은은, 만든다. 계속 인생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상처와 치유, 바다의 기쁨과 대지 위의 고독을 노래한다. 여행자는 나이를 먹지 않는다. 가지 않은 공간, 그러나 가야만 하는 공간으로 끝없이 발걸음을 옮길 뿐이다.

기자명 김작가 (대중음악 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