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일을 하고 사는 사람이라면 돈은 좀 덜 받아도 상관없다는 누군가의 발언이 인터넷을 달군 적이 있었다. 창작자들에게 이 말은 누군가가 실수로 흘린 말 같은 게 아니다. 다양한 분야와 현장에서 일상적으로 수도 없이 듣게 되는 말이다. 며칠 전 동료 작가 몇 사람과 야심차게 준비하던 기획 하나가 무산됐는데, 그 마지막 단계에서 결정권을 쥐고 있던 누군가가 기획을 완전히 백지로 만들며 이런 말을 남겼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작가들이 실험적인 거 하면서 희생을 안 하려고 하는 게 기분 나쁘다.” 그럴듯한 소리인 것 같지만 이 말의 의미는 이렇다. “돈은 많이 못 줘. 네가 좋아서 하는 거니까.”

창작이라는 형태의 ‘일’은 정의하기가 쉽지 않다. ‘창조’라는 차원과 ‘제작’의 차원이 함께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창조라는 일을 시장의 개념으로 설명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는 최근에 정부 고위 관계자 여러 분이 나서서 몸소 보여준 바 있다. 하지만 창작자는 창작물을 통해 돈을 벌어야 하고 그래서 때로는 그 창작물의 견적을 내야 한다. 그래서 세속의 개념, 현실적이고 경제적인 차원에서 측정할 수 있는 물리적인 지표들을 통해 자신의 창작물을 측정하기도 한다. 그림은 크기로, 조형물은 무게로, 공연은 공연장 크기로, 글은 원고지 분량으로….

그런데 이런 ‘제작’을 재는 단위들은, 탐정 앞에 놓인 범행 현장의 발자국 같은 것이다. 발자국 위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은 3차원 공간에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순차적으로 발생한 사건이지만, 그 흔적은 흙바닥이라는 2차원 평면에 시간의 흐름을 무시한 채로 찍혀 있다. 원고지 100장 분량의 소설을 쓰기 위해 150장짜리 초고를 썼다가 다시 50장을 줄인 창작자의 작업 과정 같은 건 제작이라는 차원에서는 거의 포착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니 창작의 가치가 진짜 제작으로 환산되어 평가될 수 있다고 믿어서는 곤란하다. 그건 그냥 임시방편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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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 일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생각해보자. 일단 세상에는 이런 식의 합리성이 존재한다. “좋아서 하는 일이니까 돈은 덜 받고 하는 게 당연하잖아.” 그리고 다른 한편에는 이런 합리성도 존재한다. “좋아서 하는 일이니까 결과물의 질도 더 좋겠지. 그러니 충분히 보상해야 돼.” 후자가 이상적인 말로 들리겠지만, 사실은 더 보편적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면접을 보거나 연봉 협상을 하러 갔을 때 자신의 일에 대해 적용하는 합리성이기 때문이다. 연봉을 많이 받기 위해서 “저는 제 일이 너무너무 싫은데요” 하고 말할 사람은 드문 것처럼.

사회적으로 합의된 최소한의 선 지켜져야

그렇다면 어느 합리성을 선택하는 게 좋을까. 물론 상황에 따라 다를 것이다. 양쪽 모두 저마다 적합한 상황이라는 게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 두 가지 모두가 자유로운 선택지로 남아 있기 위해서는 사회적으로 합의된 최소한의 선 정도는 반드시 지켜져야 하리라고 본다. “당신이 좋아서 하는 일이니까 그 상식선을 훨씬 밑도는 보상을 받아도 상관없다”라는 생각은 문명세계의 상식으로는 적합하지 않을 테니까. 창작자들이 분노하는 건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좋아하는 거 하면서 돈까지 벌려 하느냐고? 그렇다. 바로 그거다. 도대체 어디가 이상하게 들리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게 바로 창작이라는 직업이다. 순서를 바꿔서 한번 생각해보자. 좋아하는 일이라 돈을 덜 주겠다니. 하지만 그 돈 벌자고 좋아하던 일을 일부러 싫어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런 건 이미 창작이 아니라 제작이니까.

기자명 배명훈 (소설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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