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항쟁을 다룬 영화 〈지슬〉의 첫 장면은 숨겨진 섬 제주를 향해 하늘을 비행하듯 흐르는 구름바다이다. 두꺼운 구름바다는, 마치 이념의 덮개처럼 광폭한 만행으로 스러져간 사람들의 순박했던 삶을 감추는 듯하다. 독립영화로 10만 관객 돌파도 예상된다는 〈지슬〉은 잊혀간 광기의 역사 4·3항쟁을 길어 올리고 있다. 반성도 치유도 없이 광주 학살, 용공좌경 조작, 제주 해군기지의 폭력, 최근에는 종북 소동으로 변주되고 반복되며 이어진 그 광기의 역사적 뿌리, ‘빨갱이 토벌’의 현장을.

해방 정국에서 국내 정치 세력의 날카로운 분열과 혼돈, 38도 이남과 이북을 가른 미국·소련 신탁통치, 남한 단독선거 결정(1947년 유엔총회)으로, 온전한 자주독립 국가를 염원하던 민중의 꿈은 좌절되었다. 1946년 9월10일 미군정 공보부가 8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미래의 한국통치구조에 관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남한 민중이 원했던 체제는 사회주의 70%, 공산주의 10%, 자본주의 13%였다. 이 때문에 남한 단독선거에 반대하는 제주도민 30만명 중 3만여 명의 민간인을 ‘빨갱이 사냥’으로 무참하게 학살하는 와중에도, 1948년 제헌헌법은 다음과 같은 사회주의적 요소를 일부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대한민국의 경제질서는 모든 국민에게 생활의 기본적 수요를 충족할 수 있게 하는 사회정의 실현과 균형 있는 국민경제 발전을 기함을 기본으로 한다. 각인의 경제상 자유는 이 한계 내에서 보장된다(제84조).”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사기업에 있어 근로자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이익의 분배에 균점할 권리가 있다(제18조).”

그러나 평등한 사회를 향한 이 같은 합의가 점차 훼절되어간 것은 우리가 아는 바와 같다. 그것은 척결 대상이었던 친일 세력이 ‘반공’을 무기로 적대자들을 압살하면서 남한의 지배 세력으로 안착한 과정과 동시에 이루어졌다. 친일파는 미군정 아래서 제한적 농지개혁과 적산 불하, 반민특위 국회의원과 김구·조봉암 등 진보 정치인 암살 등을 자행하면서 살아남았다. 이승만·박정희 친미 독재정권으로 상속된 친일 유산은 1987년 직선제 선거 국면에서 양김 단일화 실패의 어부지리로 명을 이어 군부 독재정권에 승계됐다.

1987년 6월 항쟁은 군부 독재정권을 굴복시켰으나 완전한 종식에는 실패했다. 비록 미완의 성공이었지만, 항쟁의 성취감은 분단체제 극복 열망의 도화선에 불을 댕겼다. 1986년 10월 처참했던 건국대 농성 진압작전도, 학생들에게 가해진 ‘용공좌경’ 조작도, 극렬한 학생운동 와해 공작도, 분단을 극복하겠다는 결기를 제압할 수 없었다. 통일운동 열기는 빠르게 확산됐고, 노태우 정부는 1988년 이산가족 생사 확인과 남북 교류 의지를 밝힌 7·7 선언으로 민심을 받아 안았다. 1990년에는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도 제정됐다. 동서 냉전체제가 끝났고, 남북 교류가 시작됐으며, 남북 동시 유엔 가입도 성사됐다(1991년).

그러나 이런 상황과 함께 남한 사회에서는 ‘우익 부활’을 외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른바 ‘1차 북핵 위기’가 진행되던 시기였다. 당시의 북·미 상호 간 핵 위협은 여전히 친일유산 세습 정권인 김영삼 정부와 유훈통치 세습 정권인 김정일 체제의 적대적 공생 조건으로 작동했던 것이다.
 

미국의 전술 핵무기는 1957년 7월부터 한국에 배치되기 시작했다. 북한도 1960년 중반부터 극비리에 핵 개발에 착수한 것으로 알려진다. 북한의 핵 개발에 긴장한 미국의 요청으로 1988년 10월 개시된 북·미 간 공식 외교 교섭은 1992년 북한의 국제원자력기구(IAEA) 협정 서명으로 일단락된다. 북한은 6차에 걸친 IAEA 사찰을 받았으나 특별사찰 결정에는 반발하면서 1993년 핵확산금지조약(NPT:비핵보유국의 핵무기 보유를 금지)을 탈퇴했다. 이처럼 제1차 북핵 위기가 가파르게 파고를 타던 1994년 7월, 서강대 박홍 총장은 청와대 주최 대학총장 오찬모임에서 “주사파 뒤에 사노맹이 있고 그 뒤에 북한의 사노청과 김정일이 있다”라는 느닷없는 발언으로 파문을 일으켰다.

‘빨갱이 사냥’의 기원은 친일 세력

북한 공작금과 지령에 의해 암약하는 주사파가 학계, 학생운동 조직, 정·재계 전역에 퍼졌다는 연이은 박홍 총장의 충격 발언에 보수·우익 단체와 전국 교수들은 지지 성명과 시위로 호응했고, 조·중·동으로 불리는 보수 신문들은 덩달아 칼춤을 췄다. 박홍 총장의 발언은 거짓으로 판명되어 명예훼손에 의한 7000만원의 배상 판결까지 받았지만, 박 총장의 주사파 발언 파문은 제주 4·3 항쟁과 한국전쟁의 빨갱이 토벌단 유령을 화려하게 부활시킨 내림굿이었다.

부활한 망령은 전 사회를 잠식해갔다. 심지어 진보·개혁 진영의 내부 분열에도 막강한 위력을 발휘했다. 반값등록금 요구도, 제주 해군기지 반대도, 유신의 역사적 평가도, 전교조도, 박원순 서울시장도, 한홍구 교수도 ‘종북·반북’ 편가르기 칼질을 피하지 못했다. 분방한 예술가 낸시랭조차 종북 판정의 도마 위에 올랐다. 하긴 청와대 대변인의 화려한 ‘종북’ 발언 경력을 두고 어찌 다른 사람을 탓할 수 있겠는가. 종북 매도 발언과 관련해 허위 사실에 의한 명예훼손죄를 인정하는 판결이 속속 발표돼도 부활한 망령의 위력은 수그러들 줄 모른다.

2010년에 발표되자마자 전 유럽을 석권한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프라하의 묘지〉는 히틀러에게 유태인 학살 근거를 제공했다는 ‘시온 의정서’(유태인들의 세계정복 계획을 묘사한 허위 문서)의 위작 과정을 그렸다. 음모와 거짓이 조작되고 진실로 수용되어 파시즘적 광기로 진화하는 과정에는 ‘좌절된 욕망’과 ‘왜곡된 공포심’이라는 숙주가 필요하다. 지배계층은 기득권 유지를 위해 배양한 숙주(viral host)를 사람들의 뇌세포에 심는다. 이탈리아 통일운동과 시민혁명 시대의 왕당파가, 공산주의 혁명에서는 부르주아 지배계급이, 제1·2차 세계대전에서는 제국의 파시스트가, 유대인에 대한 거짓·과장·왜곡된 공포와 증오를 숙주로 삼았다.

21세기 한반도에서 ‘빨갱이’에 대한 거짓된 증오와 혐오감을 확산하는 세력은 누구이며 그들이 지키려는 것은 무엇인가. 증오가 배태된 역사를 직시할 능력과 진실에 눈감지 않는 열린 마음만이 호시탐탐 뇌를 잠식할 기회를 노리는 숙주를 방어할 힘을 키울 것이다.

기자명 권경애 (변호사)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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