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준의 소설 〈소문의 벽(壁)〉에 나오는 에피소드다. 6·25가 터진 직후의 어느 산골 마을. 어머니와 소년이 잠든 방문을 부수듯 열어젖히고 사내 여러 명이 들이닥친다. 한국 군경일 수도 있고, 북한을 지지하는 ‘공산 비적’일 수도 있다. 이 사내들, 눈부신 전짓불을 어머니 얼굴에 내리꽂으며 묻는다.

“너는 누구 편이냐?”

어머니는 섣불리 대답할 수 없다. 말 한마디에 목숨이 걸렸다. 그녀의 ‘진정한’ 정치적 입장이 ‘한국 편’이든 ‘북한 편’이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어머니가 보일 ‘언행’(그녀는 살아남기 위해 거짓을 말할 수도 있다)이다. 그것이 사내들의 정치적 입장과 일치해야 살해되지 않는다. 침입자는 이 허술하고 잔인한 시험에서 제출된 여인의 답변(언행)을 자기들끼리 멋대로 해석해 죽일지 살릴지 ‘합의’할 것이다.

60여 년 전에만 있었을 법한 일이 아니다. 2013년 한국에서도 ‘너는 대한민국 편이냐, 북한 편이냐’라는 질문이 특정 정치인과 불특정 대중에게 내리꽂히고, 자칫 ‘북한 정권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종북’으로 낙인찍힌다. 소설과 다른 점은, 질문자의 얼굴이 보인다는 것. 집권 새누리당의 정치인들, 국정원, ‘애국세력’이라는 민간인들….

제주 강정마을에서 나온 종북타령

새누리당 김무성 전 의원은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반대운동이 본격화된 2011년 여름, 당시 한나라당 최고위원·중진의원연석회의에서 “(건설을) 반대하는 세력들은 김정일 정권의 꼭두각시 종북세력이다”라고 주장한다. 새누리당 중앙선대위 총괄선대본부장을 맡았던 지난해 대선 직전에는 “대한민국 발전을 저해하고 자유민주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종북 좌파 세력에게 절대로 정권을 내줄 수 없기에, 죽을 각오로 정권을 재창출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사실상 문재인 당시 민주통합당 후보(와 그 세력)가 종북 좌파라는 뜻이다.

ⓒ뉴시스3월26일 보수 단체들이 주최한 ‘천안함 폭침 3주기 국민 추모제’에 참가한 이들이 북한을 규탄하는 팻말과 태극기를 들고 있다.


‘종북’ 혹은 ‘반(反)대한민국 세력’이란 단어가 없으면, 칼럼 하나 쓰기 어려웠을 언론인도 있었다. 현재 청와대 대변인 윤창중씨다. 그는 서울시장 보궐선거 직전 한 일간지에 박원순 당시 무소속 후보가 당선되면 다음과 같은 일이 벌어질 거라고 썼다. “종북세력들이 점령군 완장 차고 몰려가 서울시청 요직은 물론 17개 산하단체 모두 꿰찰 것이다. 법정에서만 김정일 장군 외치는 게 아니라 종북 시위꾼들이 광화문광장에 모여 김정일 장군님 만세! 함성을 터뜨리고야 말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는 대선 다음 날에도 ‘국가 중심세력이여 영원하라!’라는 칼럼에서 사자후를 토했다. “이번 박근혜의 승리는… 대한민국의 풍요와 발전에 거대한 불을 붙여온 ‘대한민국 세력’과 이를 뒤집으려는 ‘노무현 세력’의 일대 격돌, 거기에서 ‘대한민국 세력’이 마침내 승리했다. …‘반박근혜 세력’이 국민의 절반이나 된다는 사실부터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 그걸 제대로 인식하고 ‘단칼’로, ‘한 방’으로 ‘박근혜 정권’을 세워야 한다.”

국가정보원도 ‘종북세력’과의 싸움으로 지난 대선 기간을 통과했다. 대선을 8일 앞둔 지난해 12월11일 중앙선관위는 민주당 당원 등과 함께 서울 역삼동 오피스텔을 급습한다. 그곳엔 국정원 여직원 김 아무개씨가 있었다. 이른바 ‘국정원녀 사건’이다. 4개월여 지난 현재 확인된 ‘팩트’는 김씨가 여러 사이트에서 다수의 아이디로 정치적 내용의 게시물을 작성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국정원 측은 당초 김씨의 ‘댓글 작업’ 자체를 부인하다가 개입을 부정할 수 없게 되자 ‘종북세력의 추종 실태에 대응해 올린 글’이라고 말을 바꿨다. 이에 더해 최근에는 민주당 진선미 의원이 지난 대선 기간 국정원 인트라넷에 게시된 ‘(원세훈) 원장님 지시·강조 말씀’을 폭로했다. 그 내용은, “종북세력들이 사이버 공간에서 선전·선동하며 국정운영을 방해, 좌시해서는 안 됨” “종북세력들은 사이버상에서 국정 폄훼활동을 하는 만큼 선제적으로 대처해야 함” 등이다. 국정원이 ‘종북세력’이란 개념을 지렛대로 대선 여론 조작을 실행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종북세력은 누구인가

그런데 김무성·윤창중·국정원이 싸움의 대상으로 지목한 ‘종북’은 무엇인가. ‘원장님 지시·강조 말씀’에도 ‘종북’이란 개념은 불명확하다. 진선미 의원실 관계자도 “일단 민주노총과 전교조는 딱 찍어 종북세력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전체 맥락으로 보면 이명박 정부 정책에 대한 각종 비판을 종북 활동으로 간주하는 뉘앙스를 부인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시사IN 자료변희재 대표는 박원순 서울시장(오른쪽)에 대해서도 종북세력으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한은 다수의 대중이 굶주리고 외부로부터 식량 지원을 받아야 하는 나라다. 더욱이 탈북자들의 증언이나 관련 보고서를 10%만 신뢰한다 하더라도 사회정의나 인권 차원에서 세계 최악의 국가다. 거주 이전과 직업 선택의 자유가 없고, 한 가문이 3대째 대를 이어 최고지도자 노릇을 하고 있다. ‘(김정일) 장군님 축지법 쓰신다’ 따위의 노래가 공식 유통되는 것을 감안하면, 문화적으로도 매우 뒤진 나라다. 사실 ‘종북’이라는 ‘딱지’는 대한민국 시민에게 사회적으로나 법률적으로 ‘금치산 선고’와 다를 바 없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시민 중 누군가를 공적으로 ‘종북’이라고 호명하려면 충분한 이유가 필요하다. 이를 나름 체계적으로 정리해 이른바 ‘애국세력’ 사이에서 상당한 호응을 얻어내고 있는 사람이 바로 인터넷 언론 〈미디어워치〉의 변희재 대표다(“진중권, 이정희 찬양하고 종북세력 은폐해” 인터뷰 기사 참조).

변희재 대표는 3월5일 인터넷 언론 〈뉴데일리〉에서 자신의 ‘종북’ 개념에 대해 비교적 소상히 밝혔다. 그에 따르면, 종북에는 협의와 광의의 개념이 있다. 일단 종북의 가장 좁은 개념(협의)은 “북한 김씨 일가를 찬양하며 대한민국을 전복하려는 세력이다.” 특정인이 김씨 일가를 찬양하는지 아닌지, 그 속내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변 대표는 “이러한 종북 개념은 사람의 영혼을 들여다봐야 한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지니고 있다”라면서 비교적 합리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바로 “오직 사람의 말과 행동을 근거로 판단해야 한다”라는 것이다.

어떤 말과 행동(언행)인가. 북한의 대남적화 노선이라는 ‘국보법 폐지, 미군 철수, 연방제 통일안’에 대한 지지 여부다. 예컨대 박원순 서울시장의 속마음은 아무도 모르지만 그가 이 세 가지를 “포괄적으로 동의 및 지원”해왔으므로 ‘종북’이라는 것이다. 또한 변 대표가 ‘협의의 종북’으로 간주하는 통합진보당과 손잡은 세력도 종북으로 부르자고 제안한다. 지난해 초 진보신당에서 탈당한 뒤 통합진보당에 합류했던 정치인인 노회찬·심상정·조승수 (전) 의원 등이 해당된다. 이로써 한국에서 새누리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은 종북으로 분류될 수 있다. 지난해 총선 당시 결성된 야권연대에는 통합진보당이 포함되어 있었으니까.

이에 더해 변 대표는 종북의 개념을 더욱 확장한다. 즉 ‘광의의 종북’ 개념이다. 즉, “특별한 권력욕도 없고, 북한의 적화노선을 추종하지도 않는데 종북세력의 집권에 힘을 보태는 세력”이다. 트위터에서는 이렇게 쓰기도 했다. “저는 종북이란 단어를 대중화시켜야 한다고 봐요. 깊이 없고 수준이 낮은 인물들이야말로, 종북이들의 대한민국 전복에 가장 큰 기여를 하므로, 질 낮은 인간들 자체가 다 종북인 겁니다.” 변 대표가 이에 포함시킨 인물이 바로 낸시랭이다. 변 대표는 ‘낸시랭을 종북주의자라고 주장했다’는 〈경향신문〉 보도와 달리 자신은 낸시랭을 ‘친노종북 세력의 새로운 희망’으로 표현했을 뿐 ‘종북’이라고 한 적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의 트위터 타임라인을 보면 그렇지 않다. “낸시랭은 최극단적 광의의 개념에서의 종북입니다. 스스로 종북질을 하는 게 아니라, 총선과 대선 참패로 희망을 잃은 친노종북 세력들이 그냥 기어들어가 찬양하면서, 종북세력에 합류된 아주 독특한 경우예요.” 문장으로 보면 변 대표는 낸시랭에 대해 ‘최극단적 광의의 개념’이라는 단서를 붙이긴 했으나 종북으로 지칭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협의에서 광의, 극단적 광의까지 아우르는 변희재 대표의 종북 개념이다.

그러나 이에는 나름의 논리가 있어야 한다. 예컨대 법적으로 살인과 과실치사를 가리려면 용의자의 의도가 중요하다. 그러나 용의자의 속내를 어찌 알겠는가. 이럴 때는 용의자의 외적인 언행(말과 행동)을 보고 판단해야 한다. 

실제로 우리 사회에는 법정이나 방북 이후 귀환하는 과정에서 ‘김일성 수령, 김정일 장군 만세!’를 외쳐서 자신의 ‘종북 의도’를 확증한 사람들이 극소수지만 존재한다. 북한을 두고 고구려를 연상하거나, UFO가 북한의 비밀 병기라거나, 현대 세계사를 북한의 ‘인류 자주화 투쟁’과 이에 맞서는 미국을 중심으로 설명해서, ‘인터넷의 재롱둥이’가 되는 ‘숭북(崇北) 인사’도 있다. 그러나 자신의 ‘종북 의도’를 전혀 밝힌 바 없는 인물이나 세력에게 ‘종북’ 같은 치명적인 낙인을 붙이려면 풍부한 ‘증거’가 필요하다. 이는 단지 알리바이가 없다고 해서 살인범으로 몰아세우면 안 되는 것과 동일하다.

그런데 변 대표가 제시한 종북의 요건들은 불충분하다. ‘국보법 철폐’는 표현의 자유와 맞물려 상당히 많은 시민의 지지를 얻고 있다. ‘미군 철수’ 역시 각자의 시선에 따라 ‘즉각 철수’에서 ‘통일 이후’나 ‘예측할 수 없는 언젠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낮은 단계의) 연방제도, 북한의 갑작스러운 몰락에 따른 혼란을 두려워하는 사람부터 연방제에서는 북한이 한국에 자연스럽게 통합될 것이라는 시각까지 있다. 그런데도 이 세 가지 요건 중 하나 혹은 모두를 주장하는 시민에게 굳이 종북이라는 딱지를 붙이겠다는 강력한 의지는 ‘마음에 들지 않는 많은 사람을 종북으로 부르고 싶다’는 순수한 욕망을 나타낼 뿐이다.

“김정일 XXX, 열 번이라도 말해주마”

변희재 대표는 “박원순까지 종북으로 몬다는 것은 종북이 뭔지 잘 모른다는 것”이라고 말한 하태경 새누리당 의원에 대해 이렇게 일갈한 바 있다. “애국 진영은 집에서 초상화 걸고 김일성 찬양하고 뭐고 관계없이, 외적으로, 통진 경기동부와 야합하여, 국보법 폐지, 미군 철수, 연방제 통일 등 북한 김씨들과 같은 주장하면 종북이라 부르기로 합의했습니다.” 이른바 ‘애국 진영’끼리 ‘합의’한 것뿐이다. 그렇다면 자신들끼리 연구하고 속삭이면 된다. 다른 시민(세력)에게 이런 별명(종북)을 공적으로 호명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변희재 대표가 자신(혹은 애국세력)의 기준에 따라 종북으로 부르는 MBC 노조의 박재훈 홍보국장은 “언급할 가치도 느끼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혹시 요구하면 ‘김정일 XXX’를 열 번이라도 말해줄 수 있다. 명예훼손 소송 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종북이라는 개념이 우리 사회에 가지는 함의와 다른 시민에게 주는 상처를 성찰하기 바란다.”

이런 가운데 4월4일 또 다른 ‘종북몰이’의 먹잇감이 던져졌다. 세계적인 해커 그룹 어노니머스(Anonymous)가 북한의 대남 선전 사이트인 ‘우리민족끼리’를 해킹해 회원 9001명의 명단이 유출된 것. 검찰과 경찰, 국정원 등 사정당국이 이들의 이적행위에 대해 조사에 착수했다고 밝힌 가운데, ‘일베’를 비롯한 보수 사이트에서는 여기 가입했다는 이유만으로 이들을 모두 ‘간첩’과 ‘종북’으로 몰며 신상털기에 나섰다.

기자명 이종태 기자 다른기사 보기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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