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희 전문기자노무현 대통령은 삼성이 발의한 남북 FTA 의제를 정상회담 테이블에 올렸지만, 김정일 위원장으로부터 거부당한 것일까, 아예 올리지 않은 것일까? 대통령은 북한이 개혁·개방을 못마땅해한다는 걸 느끼고 돌아왔다.
눈을 크게 떴다. 귀도 쫑긋 세웠다. 10월4일 발표된 ‘2007 정상 선언문’의 내용에 그렇게 신경을 곤두세웠다. 남한 사람치고 남북 정상이 만나 무슨 말을 했는지, 무엇을 합의했는지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야 없겠지만, 유독 필자에게는 두 달 전부터 별러온 꼭, 반드시, 기필코 확인할 것이 있었다. ‘FTA’ 혹은 ‘CEPA’라는 통상 용어의 등장 여부였다. 그러나 이것을 선언문에서 찾을 수는 없었다.

직업적 호기심을 발동한 계기는 삼성경제연구소가 지난 8월7일 내놓은 한 이슈 페이퍼였다. 제목은 ‘남북한 경제협력강화약정(CEPA)의 의의와 가능성’. ‘CEPA'는 홍콩`중국처럼 한 나라 내 두 개의 독립관세구역 간 상품과 서비스 교역, 투자 등에서 포괄적 경제협력을 꾀하는 약정인데, FTA(특히 미국형)보다는 강도가 덜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성격이 같다. 연구자들도 남북한 FTA라는 표현을 섞어 쓰고 있다.

이 삼성발 제안은 파격인 데다 시점도 묘했다. 8월28일 정상회담을 코앞에 두고 불거진 것이다(북한 요청으로 10월2일로 연기). 또 하나 스친 생각은 한·미 FTA가 그런 궤적을 밟은 것처럼 ‘혹시 이것도’였다. 삼성이 정책 의제를 만들고, 이것을 정부가 추수하며, 언론이 비판없이 알리는 ‘삼각 플레이’ 전례를 적잖이 봐왔던 터였다. 국가 정책 의제에까지 끼어드는 삼성경제연구소의 그 오지랖을 누가 당하랴. 연구의 질은 차치하고.

아니나 다를까. 대통령이 8.15 경축사에서 남북 경제공동체 건설을 역설하면서 그 기본 틀이 남북 FTA 혹은 CEPA 아니냐는 추측이 나왔다. 의문은 바로 다음날 풀렸다.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이 “남북 FTA 추진을 정상회담 의제 중 하나로 (정부 내에서)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라고 확인한 것이다. 9월14일 한덕수 국무총리의 말로 상황은 분명해진 듯했다. “개성공단 건이 한·미 FTA에 포함돼 있어 북한도 FTA에 관심을 갖고 있다. 오래전부터 북한에 FTA 관련 자료를 보내 참고토록 했다. 북한이 이번 정상회담에서 뭔가 해볼 생각이 강한 것 같다.”

흥미로운 것은 두 사람이 “북한이 얼마나 호응할지는 알 수 없다” 혹은 “김정일 위원장의 의지에 달렸다”라고 덧붙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추측이 가능해진다. 노무현 대통령이 정상회담 테이블에 이 의제를 올렸지만, 김 위원장이 호응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검토 결과 부담스러워 아예 올리지 않은 것이다. 경제학자 가운데는 남북 FTA 구상을 FTA에 대한 기본 이해도 없는, 정신 나간 발상이라고 극언하는 이도 있다.

확인할 길은 없지만, 어느 경우든 잘되었다는 안도감이 든다. 혹여 남북이 경제협력하는 것에 반대하는 이상한 부류로 여길지 모르겠으나 오해하지 마시라. 그건 아니다. 남북 FTA는 말할 것도 없고 남북 CEPA의 경우도 남한 자본 주도로 북한 경제체제를 급속도로 ‘시장화’ 혹은 ‘자본주의화’ 함을 의미하므로, 그 위험성을 경계할 뿐이다.

남북 FTA는 북한에서 변화의 ‘역전 불가능성’ 만들기 프로젝트?

삼성경제연구소는 왜 남북한 CEPA를 들고 나온 것일까? 연구자들은 CEPA가 남북 교류를 확대시켜 북한에서 변화의 '역전 불가능성'을 만들 수 있다고 본다. 이것은 ‘북한 내부에 경제 교류의 지속성에 이해관계를 갖는 경제세력을 만들어내느냐’에 달려 있다. 한`미 FTA에 따른 구조조정 압력에 직면한 남한 기업이 북한에서 새로운 활로를 찾거나, 북한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도 CEPA가 요긴하다는 것이다.
 
좋게 보면, 남한 기업 입장에서 경협을 가로막는 수많은 요인을 하나씩 해결하는 데에는 시간이 너무 걸리고 어려우므로, 단박에 해소하는  이런 포괄적 해법을 생각해낼 수 있다. 하지만 CEPA 같은 전면적 시장 개방을 북한이 받아들일 리 없다. 노 대통령이 귀경길 개성공단에서 ‘북한은 개혁 개방에 대한 거부감이 크다’고 밝힌 데서도 잘 드러난다. 개방 없는 경제협력으로 북한이 경제 위기를 돌파할 수 없다는 학자들의 지적은 수긍할 만하지만, 문제는 속도다. 거의 경제통합 수준의 급격한 개방은 그 파장과 부담을 감당하기 어려워 남한에도 이롭지 않다. 남북한은 경제 규모로는 30배, 1인당 GDP로도 20배나 격차가 난다. 10배 차이 나는 동·서독도 수년 동안 통합 후유증에 시달렸다.

선언문 5항에 따르면, 남과 북은 ‘경제협력 사업을 공리공영과 유무상통의 원칙에서 적극 활성화하고 지속적으로 확대 발전시켜나가기로’ 했다. 대통령이 가장 핵심적이고 진전된 합의라고 평가하는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도 이런 기저에서 나왔다. 앞으로 얼마나 제대로 추진하느냐에 달렸지만, 꽤 속도를 낸 것이므로 삼성도 만족스럽지 않을까.

기자명 장영희 전문기자 다른기사 보기 coo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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