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14일 오후 3시30분 대전시 둔산동 대전질병판정위원회 사무실. 이은숙씨(가명·40)는 다섯 살배기 아들 정민(가명)이를 데리고 출석했다. 이씨와 함께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반올림) 소속 이종란 노무사도 두툼한 자료를 챙겨 동행했다. 이씨의 남편 김진기씨는 2011년 5월28일 밤 10시47분 강남성모병원 백혈병동 중환자실에서 숨졌다. 서른여덟 살이던 아빠는 아들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이종란 노무사는 두툼한 자료를 위원 여섯 명에게 나눠줬다. 삼성 백혈병 사례와 법원의 판례, 해외 자료 등을 근거로, 매그나칩 반도체 청주사업장에서 일한 김씨의 백혈병 발병이 작업환경과 관련이 깊다고 호소했다. 이종란 노무사는 “숱하게 산재 신청을 했지만 김씨만큼 자신이 직접 명확한 증거를 제시한 적이 없다”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럼에도 상황은 불리했다. 위원들이 산재 판정을 내릴 때 주요 근거로 삼는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의 역학조사 결과, 작업환경과 백혈병 발병 상관관계가 낮게 나왔다.

삼성 반도체 문제 뒤 설비 교체

그로부터 8일 뒤인 3월22일 오후 이씨는 운전을 하던 중 근로복지공단으로부터 남편의 산재 인정 통보를 받았다. 대전질병판정위원회가 간발의 차로 김진기씨를 산재로 인정했다는 것이다. 반도체 사업장에서 발병한 백혈병 노동자에 대한 근로복지공단의 첫 산재 인정이었다. 삼성 백혈병의 경우 근로복지공단이 산재를 인정하지 않아, 소송 끝에 행정법원 1심에서 산재 판결이 났다(근로복지공단이 항소해 현재 2심이 진행 중이다. 항소심에서도 삼성은 피고 보조 참가인 자격으로 역시 재판에 참여하고 있다). 청주노동인권센터 조광복 노무사는 “산재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다. 김씨가 눈을 감으면서도 지켜낸 ‘증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2010년 7월1일 서울 강남성모병원 로비 카페. 반올림 소속 공유정옥 산업보건전문의는 김진기씨를 만났다. 김씨가 먼저 반올림에 연락을 했다. 그해 6월22일 김씨는 백혈병 중에서도 가장 악성인 ‘만성 골수 단핵구성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3월31일 삼성전자 소속 박지연씨가 백혈병으로 숨지면서 ‘삼성 백혈병’ 논란이 한창일 때였다. 김씨는 혹시 자신도 작업환경과 백혈병이 관련된 건 아닌지 의심했고, 인터넷을 뒤져 반올림에 연락했다. 이날 김씨는 공유정옥씨와 처음이자 마지막 상담을 했다.

ⓒ시사IN 고제규 고 김진기씨의 아내 이은숙씨가 남편과 아이가 함께 찍은 가족 사진을 들고 있다.
김씨 가족 가운데 백혈병으로 사망한 이는 없다. 3남 1녀 중 막내인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해군 하사관으로 5년간 복무할 만큼 건강했다. 하사관 복무를 마치고 1997년 입사한 첫 직장이 청주에 있는 LG 반도체였다. LG 반도체가 하이닉스 반도체로 인수·합병되었고, 2005년 매그나칩 반도체로 주인이 바뀌었다. 회사 이름은 세 번이나 바뀌었지만 김씨의 업무는 14년 동안 똑같았다. 반도체 공정 가운데 전리방사선이 주로 발생하는 임플란트 공정의 예방 정비 업무(Preventive Mainten-ance)를 하는 PM 업무였다. 발병 당시 그와 함께 일한 PM 업무 담당자는 20명이었고 4개 조로 3교대 근무를 했다. 아침 7시, 오후 3시, 밤 11시 세 조로 나뉘어 각 조가 6일씩 근무한 뒤 이틀을 쉬는 근무형태였다. 직업군인 출신이어서인지, 김씨는 회사 생활도 ‘FM(Field Manual)’대로 했다. 한 동료는 “집과 회사만 왔다 갔다 한 친구였다. 노조 같은 데 아예 관심도 없었다”라고 말했다.

2005년 10월 김씨는 동갑 이은숙씨와 결혼했다. 결혼한 지 3년 만인 2008년 3월 아들 정민이를 낳았다. 아이가 태어나자, 김씨는 ‘아들바보’ 아빠였다. 회식이 있어도 밥만 먹고 곧장 집으로 갔고, 집 앞 슈퍼마켓에 갈 때도 아내와 아들 둘만 내보내지 않았다. 위험하다며 꼭 동행했다. 예방접종을 하러 병원에 갈 때면 자기가 직접 운전을 해서 함께 갔다. 야간 근무를 하고 돌아온 날에도 아이와 놀아주었다. 아내 이씨는 “평생 줄 정을 한꺼번에 주고 떠나려고 그랬는지, 아이밖에 몰랐다”라고 회상했다.

김씨는 아이가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이상을 느꼈다. 피곤이 가시지 않았다. 2008년 5월 회사 정기검진에서 갑상샘 질환(갑상샘기능저하증)이 발견되었다. 평생 갑상샘 약을 복용해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다. 개인 질병으로 여긴 김씨는 약을 복용하며 근무했다. 하지만 2010년 4월30일 회사 정기 건강검진 때 백혈구 수치에 이상이 발견되었다. 혈액 1㎕당 4000~1만 개가 정상 수치인데, 김씨의 백혈구 수치는 무려 6만4000개였다. 그해 5월24일 강남성모병원 혈액내과에서 정밀 골수 조직검사를 받았고, 6월22일 백혈병 확진을 받았다.

2010년 7월1일 그렇게 확진 열흘 만에 강남성모병원에서 처음 만난 공유정옥씨에게 김씨는 “반올림이 지속적으로 활동한 덕분인지, 2008~2009년께 회사가 설비를 바꾸는 등 작업환경이 그나마 나아졌다”라고 말했다. 공유정옥씨가 산재 신청을 할 것인지 묻자, 김씨는 “회사가 산재처리 대신 치료비 전액과 휴직을 제안했다. 생각해보고 결정하겠다”라고 말했다. 헤어지며 공유정옥씨는 “혹시 나중에 산재 신청을 할 때 필요할지 모르니, 설비 교체 전후가 담긴 회사 자료가 있으면 챙겨두는 게 나을 것 같다”라고 덧붙였다. 공유정옥씨는 그날 반올림에 돌아와 상담일지를 작성했다. 그 뒤 두 사람 사이 연락은 없었다. 한두 번 공유정옥씨 휴대전화 벨이 울리기는 했다. 한밤중에 전화벨이 울리고 아무 말 없이 끊기자, 공유정옥씨가 김씨에게 전화를 했다. 김씨는 “아이가 스마트폰을 가지고 놀다가 번호를 눌렀나보다. 잘 지낸다”라고 답했다. 정민이가 메신저 노릇을 한 것이다.

김씨의 인사치레와 달리 백혈병은 악화되었다. 치료약이 듣지 않아 골수 이식 외에 방법이 없었다. 확진 다섯 달 만에 골수단핵구성 백혈병의 특징인 유전자 변이가 진행되었다. 그때까지 김씨는 청주와 서울을 오가며 통원치료를 했다. 회사는 약속과 달리 치료비 전액을 지원해주지 않았다. 김씨는 골수 이식을 위해 입원하기 직전인 2011년 3월까지 회사에 다녔다. 그해 3월28일 휴직하고 4월3일 강남성모병원에 골수 이식을 위해 입원했다.  

2011년 3월 휴직 일주일 전 김씨는 출근길에 아내에게 두꺼운 겨울 파카를 챙겨 달라고 했다. 퇴근한 뒤 그는 파카 속에서 서류봉투를 꺼내 아내에게 건넸다. 김씨는 “잊어버리지 말고 보관 잘해둬. 혹시 내가 잘못되면 이것을 꼭 반올림 소속 공유정옥 선생에게 줘”라고 말했다. 아내는 별소리 다 한다며 서류를 열어보지도 않고 서재에 끼워두었다.

2011년 4월27일 강남성모병원 백혈병 병동 중환자실. 아내 이씨는 의료진으로부터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일주일 전 골수 이식을 받았는데, 부작용인 이식편대숙주반응(이식된 조직이 환자를 공격하는 현상)이 심했다. 부작용을 줄이는 약도 듣지 않았다. 심장·간·위 등 내부 장기뿐 아니라 얼굴 피부마저 녹아내렸다. 5월21일 김씨는 심장이 한차례 멈췄다. 응급조치로 되살렸지만 뇌 쇼크로 정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했다. 이씨는 마지막으로 아들을 남편에게 보여주려고 정민이를 급하게 청주에서 데려왔다. 하지만 세 살 정민이는 피부마저 녹아내린 아빠를 알아보지 못했다. ‘아들 바보’ 아빠도 그토록 보고 싶었던 아이를 못 알아봤다. 아이가 다녀가고 나흘 뒤 5월25일 기적처럼 딱 한번 김씨는 정신이 돌아왔다. 아내를 알아본 그는 사력을 다해 입을 달싹거렸다. 이씨는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몰랐다. 입을 벌렸다 오므렸다 반복했다. 두 단어 같았다. 귀를 가까이 대고서야 “서류”라는 말을 알아들었다. “무슨 서류?”라고 물어도 김씨는 “서류”만 겨우 반복했다. “지난번에 공유정옥씨 주라고 말한 그 서류?”라고 이씨가 묻자, 김씨는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것이 김씨가 세상에 남긴 마지막 유언이었다. 이씨는 곧장 김씨의 휴대전화에서 공유정옥씨 연락처를 찾아 연락을 했다. 공유정옥씨는 병원으로 달려와 임종을 함께했다. 사흘 뒤인 5월28일 김씨는, 1년 전 삼성 백혈병을 앓다 강남성모병원에서 숨진 박지연씨가 마지막 호흡을 내쉬었던 그 침상에서 눈을 감았다.

김진기씨의 마지막 말 “서류…”

공유정옥씨와 이종란 노무사는 장례식 첫날 김씨가 남긴 서류를 받았다. 서류를 받아든 공유정옥씨는 깜짝 놀랐다. 2년 전 그녀가 조언한 바로 그 증거 서류였다. 작업 환경 전후 사진과 설명, 위험 등이 담긴 회사 내부 자료였다(아래 사진). 삼성 백혈병 산재 신청과 소송을 할 때마다 벽에 부딪혔던 게 증거 자료 부족이었다. 회사는 반대 자료를 많이 내놓았지만, 산재 신청인들은 본인의 경험담 외에 자료가 없었다. 삼성 백혈병을 공론화시킨 고 황유미씨도 기껏해야 일기장이 전부였다. 그에 비하면 김씨가 건넨 자료는 완벽했다. 사망진단서에도 의료진은 “혈액암이 직업적 노출과 관련이 높음을 시사한다”라고 밝혔다.

김진기씨가 반올림에 건넨 회사 자료. 작업환경 개선 전후 비교 내용이 담겼다.

2011년 9월
아내 이씨는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산재를 신청했다. 우여곡절도 많았다. 유족이 추천하는 전문가가 참여한 가운데 역학조사를 실시할 것을 근로복지공단에 제안해, 삼성 백혈병 관련 논문을 쓴 김현주 단국대 교수를 비롯한 전문가 3명이 자문위원 성격으로 결합했다. 그러자 회사도 자신들이 추천한 인사가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삼성이 백혈병 문제를 다루기 위해 만든, 삼성전자건강연구소 부소장 김수근 교수 등 두 명이 회사 쪽 자문위원으로 참여했다. 매그나칩 반도체 백혈병 산재 다툼이었지만, 이면에는 삼성 백혈병 문제를 다룬 양쪽 전문가들이 포진했다. 두세 차례 역학조사에서 방사선 노출이 정상치로 조사되었다.

하지만 역학조사의 결과를 뒤집는 데는 김씨의 증거자료뿐 아니라 결정적인 증언도 한몫했다. 삼성 백혈병 산재 신청이나 소송과정에서는 증언자로 나서는 동료가 한 명도 없었지만, 매그나칩에서는 김씨의 동료가 나섰다. 작업 매뉴얼과 달리 현장에서 이뤄지는 작업환경과 위험을 고스란히 증언해주었다. 이 동료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증언 때문에 회사로부터 불이익은 없다. 우리의 문제이기도 해서 증언했다”라고 말했다.

아빠를 알아보지 못했던 여섯 살 정민이는지금도 죽음을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한다. 정민이는 살가운 아빠를 잃은 탓에 한동안 실어증에 걸리고 불안감에 시달렸다. 지금도 일주일에 두 번, 네 시간씩 심리치료를 받는다. 많이 나아졌지만, 한번은 어린이집에서 역할극 놀이를 할 때 “난 아빠가 없어”라며 소리 내 울기도 했다. 그런 정민이도 ‘산재’의 뜻을 안다. 엄마 이씨가 “산재를 인정하게 해주세요”라고 밤마다 소리 내 기도를 올리자, “산재가 뭐야”라고 정민이가 물었다. 이씨는 “아빠가 산재를 인정받아야 우리 정민이가 공부도 할 수 있고, 학교도 다닐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그러자 대뜸 정민이는 “와! 아빠가 집에 돌아오는 날이네”라며 그 나름으로 이해했다.

2013년 3월23일
청주 목련공원. 산재 인정 통보를 받은 다음 날 이은숙씨는 정민이 손을 잡고 남편이 있는 납골당을 찾았다. “여보, 고마워. 이제 남은 소송도 잘할게.” 이씨는 남편의 사례가 삼성 백혈병 환자나 다른 반도체 사업장의 직업병에 시달리는 노동자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랐다. 그런 의미에서 회사를 상대로 민사소송(손해배상)도 할 작정이다. 엄마 손을 잡고 있던 정민이는 “산재 인정되면 아빠 온다고 했는데 언제 와?”라고 물었다. 이씨는 정민이를 꼭 안아주었다. “아빠가 멀리 일하러 가서 정민이가 스무 살 되면 돌아오신다.” 로보카 폴리를 손에 쥔 정민이는 “내가 스무 살이 되려면 며칠 밤을 더 자면 돼?”라고 다시 물었다. 납골당에 안치된 김씨는 아이와 함께 있다. 사진 속 김씨는 정민이를 안고 활짝 웃고 있다.

기자명 고제규 기자 다른기사 보기 unjus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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