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 여성 움무 사라 씨(38)는 미국의 침공이 개시된 10년 전 딸과 남편을 잃었다. 집 근처 과수원에 떨어진 미군의 폭탄이 딸과 남편의 목숨을 앗아간 것이다. 이 가족이 살던 바그다드 외곽 알아다미아는 사담 후세인 친위대인 페다인 부대의 본거지로 알려진 곳이었다.

그날 이후 움무 사라 씨의 인생은 바뀌었다. 폭격 당시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들 알리(당시 6세)를 치료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그러나 아이는 다리가 절단된 채 평생 걸을 수 없는 처지다. 가장을 잃은 그녀는 친척과 남동생들의 도움으로 겨우 아들과 먹고살고 있다. 이슬람 국가인 이라크에서 미망인인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녀는 “나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은 언제나 따갑다. 내가 전쟁을 일으킨 것도 아닌데 늘 이렇게 주눅 들어 산다. 생활고도 문제지만 남편과 딸을 잃은 슬픔과 분노, 그리고 사람들의 눈초리까지 견뎌야 하는 이중고를 겪고 있다”라며 흐느꼈다.

전쟁 10년 동안 이라크가 입은 피해 중 움무 사라 씨의 고난은 데이터에도 잡히지 않는 하찮은 것으로 취급된다. 그녀의 아들 알리는 벌써 16세다. 이라크에서는 10대 후반이면 경제 활동의 중심을 이룬다. 그러나 알리는 절단된 다리로 일을 할 수 없다. 그는 사담 후세인에 대한 기억도 없다. “어른들이 사담 후세인 시절 이야기를 많이 해주기는 하지만 나는 후세인을 모릅니다. 후세인이 얼마나 나쁜 사람인지 모르겠지만 나의 다리와 가족을 빼앗아간 미국보다는 낫지 않을까요?”라고 반문했다.

미국인 알렉스 패터슨 씨(34)는 미군이 바그다드로 진격하던 10년 전, 도로를 순찰하다 땅속에 매설된 폭탄이 터지면서 두 다리를 잃었다. 이라크로 가기 전의 그는 대학 학비를 벌기 위해 하루벌이 노동을 하는 가난한 학생이었다. 결국 학비 때문에 미군에 들어갔다가 이라크로 가게 되었던 것이다. “전쟁터로 가야 한다는 사실이 전혀 두렵지 않았어요. 남자라면 한번쯤 경험할 만한 모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전쟁은 영화와 달랐어요.”

미국을 재정난에 빠뜨린 전쟁

그는 부상 직후 독일로 후송되었다가 미국으로 돌아왔다. 지금은 시애틀 외곽 작은 도시에서 값싼 월세 아파트에 살고 있다. 여자 친구도 떠나고 가족들은 그를 불편해한다. 그는 “다리를 잃고 정신적 충격을 받아 가족들을 괴롭혔습니다. 더 힘든 것은 지난 10년간 잠들면 사고 순간이 악몽으로 나오는 겁니다. 그런 꿈을 꾸면 집안의 가구를 모두 부수고 혼자 술을 마십니다. 저는 혼자 견딜 수가 없어요. 나를 이해하시겠어요?”라고 물었다. 그는 미군이 지원하는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 치료를 받고 있다. 그러나 앞으로 이 치료를 언제까지 받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최근 예산 자동감축(시퀘스터)으로 국방비 예산이 직격탄을 받자 전역 군인들은 불안해하고 있다. 원호 복지정책이 대폭 줄어들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이 돌기 때문이다.

미국이 이라크 전쟁에 쏟아 부은 비용은 최소 8060억 달러(약 870조원)로 추산된다. 패터슨 같은 상이군인에 대한 각종 연금과 원호비용 등을 제외한 직접비용이 그렇다. 모든 비용을 합치면 현재까지 최소 2조2000억 달러(약 2376조원) 규모다. 그런데 미국은 이런 전쟁 비용을 국채 발행을 통해 조달했으므로 계속 갚아나가야 한다. 그 이자까지 합치면 미국이 2053년까지 갚아야 하는 돈은 모두 3조9000억 달러(약 4212조원)에 이른다. 현재 미국을 재정난에 허덕이게 한 주범도 이라크 전쟁이다.

이라크 전쟁 10년간 총 4480명의 미군과 미국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고, 3만2000명 이상이 부상당했다. 이라크 내 테러 희생자 수를 집계하는 ‘이라크 보디 카운트(IBC)’에 따르면 10만명 이상(13만4000명 추정)의 이라크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바그다드 알사드르 시티에서 철물점을 하는 하산 알타리크 씨(46)는 “이제 폭탄 터지는 소리만 들어도 거리가 얼마나 되고 얼마나 큰 폭탄인지 대충 알 정도다. 지난 10년간 온몸으로 단련된 기술이다”라고 말했다.

그만큼 이라크에서 폭탄 테러는 일상이 되었다. 2011년 12월 미군은 이라크에서 전면 철수했지만 이라크에 남겨진 이들의 상처는 현재진행형이다. 미국이 이라크 전쟁을 일으킨 이유는 첫째가 사담 후세인 제거이고, 둘째는 대량살상무기(WMD) 제거였다. 그리고 셋째는 ‘이라크에 민주국가 건설’이다. 그런데 이 세 가지 목적 중 미국이 이룬 것은 단 하나, ‘사담 후세인 제거’밖에 없다. 사담 후세인 이라크 전 대통령을 체포해서 처형했으니까.

연쇄 테러로 얼룩진 10주년

전쟁의 최대 명분이었던 대량살상무기는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인 부시 전 미국 대통령도 퇴임 후 “재임 중 가장 후회스러운 일은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보유 여부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갖지 못한 점”이라고 후회했다. 미국은 거짓 제보만 믿고 전쟁을 일으켜 무고한 민간인들을 살상한 것이다. 더욱이 이라크의 민주주의는 더욱 요원해졌다. 현재 매주 금요일마다 일어나는 반정부 시위는 이라크 정부에 의해 묵살된다. ‘아랍의 봄’ 이후 이라크 사람들도 민주주의에 눈을 떠가고 있지만 부패한 이라크 정부는 민주주의를 원치 않는다. 또한 미국은 이라크에서 ‘종파 갈등’이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 이라크 내 시아파와 수니파의 대립이 현재 이라크 정국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사담 후세인 시절에도 이 두 종파는 반목을 거듭했지만 후세인이라는 중심추가 이를 억제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이 후세인만 제거하고 떠난 지금 이라크에서 이 두 종파는 본격적인 싸움을 위해 링에 올랐다.

현재는 시아파 수장인 누리 알말리키 총리와 수니파 수장 격인 타레크 알하셰미 부통령의 싸움이 한창이다. 말리키 총리는 하셰미 부통령이 암살단을 조직하려 했다며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이에 하셰미 부통령은 말리키 총리가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누명을 씌우려 한다며 터키로 피신했다. 그 사이 이라크 사법 당국은 결석재판을 열어 하셰미 부통령에게 다섯 차례에 걸쳐 사형을 선고했다.

이에 반발하는 수니파 의원들은 시아파인 알말리키 총리가 2010년의 연정 합의를 깨고 권력을 독점하려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수니파가 주도하는 연합정당인 ‘이라키야’는 항의의 표시로 2011년 소속 장관과 의원의 각료 회의 참석과 의회 등원을 2개월여간 거부하기도 했다. 지난해 6월 초에는 이라키야 당과 쿠르드 출신 일부 의원들이 잘랄 탈라바니 대통령에게 총리 불신임안 발의를 청원했으나 무산되기도 했다. 시아파와 수니파 사이에서 ‘교통정리’를 시도해온 사람이 바로 탈라바니 대통령이었다. 그러나 지난해 12월 대통령마저 뇌출혈로 쓰러지면서 중재자도 없어진 상황이다.

지난 3월20일은 이라크 전쟁이 일어난 지 10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날 전 세계 외신과 미국 언론은 이라크 전쟁 10년을 조명하며 ‘실패한 전쟁’ ‘잘못된 전쟁’이라고 혹평했다. 그러나 주인공인 이라크는 나라 전역이 폭탄 테러로 얼룩져 10주년을 성찰할 겨를조차 없었다.

10주년 전날인 3월19일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의 시아파 거주 지역인 시이테 구역에서 수차례 폭탄 테러가 발생해 60여 명이 사망했다. 이뿐 아니라 아침 8시부터 점심시간이 될 무렵까지 스무 차례의 연쇄 테러 공격이 발생해 57명이 더 사망하고 190여 명이 부상당했다. 테러 장소는 식당, 은행, 시장, 주차장, 법원 청사와 대학 등 시민들이 주로 다니는 곳이었다.

필자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의 이라크를 기억한다. 당시만 해도 티그리스 강변을 밤 12시에 산책하며 밤하늘의 빛나는 별들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리고 전쟁 이후 부모 잃은 고아처럼 막막해하던 사람들의 눈빛도 기억한다. 이라크 전쟁 10년이 지난 지금 분명한 것은, 도처에 상처 입은 자만 가득할 뿐 승자는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이다.

기자명 김영미 국제문제 전문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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