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최대의 명화 도난 사건을 추적한 논픽션.
화가 피카소와 시인 아폴리네르가 얽힌 실제 「모나리자」 도난 사건을 통해 20세기 초 유럽의 매혹적 풍경이 펼쳐진다

1911년 8월22일 화요일. 루브르 박물관에서 「모나리자」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화가 루이 베루드가 루브르 박물관 카레관에서 「모나리자」가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전날은 휴관일이었다. 그림이 없어진 후 24시간이 지나도록 누구 하나 눈치 채는 이가 없었다. 도난 사실을 알게 된 파리 경시청장 루이 레핀은 루브르 박물관을 폐관하고, 프랑스 국경을 봉쇄했다. 루브르 박물관의 카레관에서 얼마 안 떨어진 비상계단 한쪽 구석에서 액자 두 개가 버려진 것이 발견되었다. 「모나리자」가 사라졌다는 사실이 호외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르피가로」 「파리-주르날」 「뉴욕 타임스」 등 언론이 「모나리자」 도난 사실을 다투어 보도했다. 경찰은 당시 루브르 박물관의 경비원 등을 대상으로 수사에 착수했다.

그 유명한 그림이 걸려 있던 빈 공간을 보기 위해 파리 시민들이 줄 지어 섰다. 프랑스의 신문과 정부는 「모나리자」 반환에 포상금을 내걸었다. 경찰에 수많은 제보가 쏟아졌다. 프랑스 시민들은 없어진 「모나리자」를 사들인 이가 미국인 J. P. 모건이 아닌가 의심했다. J. P. 모건은 기자들에게 “「모나리자」는 나에게 온 적이 없다. 나한테 왔다면 구입해서 프랑스에 돌려주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파리에서 뉴욕으로, 아르헨티나에서 이탈리아로, 전 세계를 넘나드는 대추적이 벌어졌다. 하지만 「모나리자」는 아무 곳에도 없었다.

유력한 용의자로 떠오른 이는 화가 피카소와 시인 아폴리네르

유력한 용의자 두 명이 떠올랐다. 화가 피카소와 시인 아폴리네르. 두 거장은 체포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다. 프랑스 정부와 언론 등은 「모나리자」의 무사 귀환을 위해 포상금까지 내걸었으나 그림은 행방이 묘연했다. 급팽창하던 신문은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나섰고, 사라진 「모나리자」는 일약 당대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2년여 뒤. 피렌체의 미술상 알프레도 제리에게 편지가 도착했다. 서명자의 이름은 ‘레오나르도’였다. 레오나르도는 「모나리자」를 팔겠다고 제안하는데…

아직도 「모나리자」의 미소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그녀는 누구였고,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는 무슨 관계였으며 그 미소의 비밀은 무엇인가? 여기에 한 가지 질문이 추가되었다. 누가 그녀를 데려갔을까? 저자 R. A. 스코티는 꼼꼼한 자료 조사를 통해 역사상 유례가 없이 흥미진진한 ‘미술품 도난 사건’의 현장으로 독자를 초대한다.

「사라진 미소-1911년 모나리자 도난 사건」에 관한 6문 6답

Q : 당시에 루브르 박물관에서 어떻게 「모나리자」가 도난당할 수 있었는가?

A : 지금과 달리 1911년 당시 「모나리자」에 대한 보안은 허술했다. 당시 루브르 박물관의 오몰 관장은 사진이라는 새 매체에 열광했다. 그림을 정기적으로 떼어내 사본을 제작했다. 손상이나 분실 혹은 미래의 복원 작업을 위해서 박물관이 정밀한 원작 기록을 보관해두기로 했다. 그런데 문제는 사진사들이 언제든지 작품에 접근할 수 있도록 허용한 것. 계약된 사진사나 관리인이면 누구라도 전시실을 돌아다니면서 따로 신청하여 허가증을 발급받거나 경비에게 알리지 않고도 벽에서 작품을 떼어낼 수 있었다. 그림들은 그냥 못에 걸려 있었기 때문에 아무라도 내려서 들고 나갈 수 있었다. 「모나리자」가 없어진 것을 보고서 당시 근무하던 경비원의 반응은 이랬다. “사진 찍고 있겠지.”

Q : 프랑스 경찰에서는 대대적으로 수사를 했다는데?

A : 당시 수사 관계자였던 베르티옹은 과학수사라고 하는 혁명적인 범죄 수사 형식을 창안한 인물이었다. 용의자들의 정면과 측면 얼굴을 촬영하여 최초로 범죄자용 상반신 사진을 창안했다. 헨리 폴즈라는 스코틀랜드 외과의의 지문 검사를 마지못해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나중에는 지문 채취의 대가가 되었다. 그는 지문 증거 하나로 살인 혐의자의 유죄 판결을 받아낸 최초의 형사였다. 코난 도일이 셜록 홈스를 베르티옹에 이어 ‘유럽에서 둘째가는 전문가’로 묘사할 정도였다.

나중에 절도범 빈센초 페루자가 검거되고 나서 프랑스 경찰의 수사는 공개 망신을 당했다. 페루자는 가장 유력한 용의자 선상에 올랐어야 했다. 「모나리자」 보호 액자 제작 때 유리공으로 참여했으니까. 그는 루브르 박물관이 제출한 전·현직 직원 명단에 들어 있었다. 프랑스 경찰은 그의 알리바이를 확인하지 않았다. 그리고 관장부터 가장 직급이 낮은 인부까지 루브르의 모든 사람에게서 지문을 채취했다더니, 그의 지문은 빠져 있었다. 게다가 이미 프랑스에서 두 차례 볃포된 기록이 있었는데도, 이 기록을 주목하지 않았다.

하긴 지문을 채취했어도 결과가 어땠을지는 모른다. 도난당한 그림 액자에는 왼쪽 엄지 지문이 발견되었다. 하지만 당시 지문을 분류하는 기준은 오른손 지문뿐이었다. 

Q : 당시 언론은 「모나리자」 도난 사건을 어떻게 보도했는가?

A : 1890년에서 1914년 사이에 신문 독자수가 세 배 가까이 늘었다. 초등교육이 의무화되면서 글 읽는 인구가 늘어났다. 이 시기는 대중 저널리즘의 황금기였다. 이 같은 신문의 급성장은 1880년대 미국에서 시작된다.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의 젊은 발행인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 2세가 뉴욕 신문 시장에 뛰어들었다. 허스트의 「뉴욕 저널」은 당시 군림하던 신문왕 조지프 퓰리처의 「뉴욕 월드」를 단숨에 제쳤다. 당시는 가정 배달 시스템이 없었고, 독자들이 가판점에서 신문을 구매하는 방식이었다. 가판에서 판매 전쟁이 벌어졌다. 선정적 이야깃거리가 신문을 팔았다. 「모나리자」 도난 사건은 대중의 관심을 끌어모으기에 좋은 소재였다. 대중은 「모나리자」를 걸작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또한 당시 독일은 군국주의자 카이저 빌헬름 2세 치하에 해군 병력을 증강하여 대영제국의 해양 지배력에 도전하고, 지중해에서 정치적 게임을 벌여 프랑스의 모로코 지배를 위협하고 있었다. 독일의 포함인 판터 호가 모로코의 아가디르 항에 상륙한 7월1일을 기점으로 프랑스와 독일은 전쟁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야당은 정부가 전쟁 위협으로부터 주의를 돌리기 위해 일부러 도난 사건을 만들어낸 것이 아닌지 의심했다. 「모나리자」 도난 사건이 온갖 매체의 머리기사를 독점하면서 부글거리던 기운은 냉정을 찾고 전쟁을 미뤄졌다.

당시 파리의 신문은 대단히 정파적이었다. 초국가주의 신문 「악시옹프랑세즈」는 유대인 육군 대위 알프레드 드레퓌스가 무고하게 반역죄로 기소되어 유배된 ‘드레퓌스 사건’과 「모나리자」 도난 사건을 연결시켜 반유대주의에 기름을 부었다. 루브르 박물관의 오몰 관장이 유대인의 손아귀에서 놀아난 인물이라고 공격했다. 

Q : 화가 피카소와 시인 아폴리네르가 「모나리자」 도난 사건의 용의자로 떠오른 이유는?

A : 1911년 8월29일 화요일. 「파리-주르날」은 “한 도둑이 루브르에서 훔친 조각상을 우리에게 가져왔다”라고 보도했다. 「파리-주르날」에 보도된 도둑(취재원)은 자신이 ‘이냐스 도르므상 남작’이라고 밝혔다. 「파리-주르날」은 “취재원을 밝힐 수 없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이냐스 도르므상’이라는 이름은 기욤 아폴리네르가 쓴 소설의 주인공 이름과 같다는 사실이 알려졌고, 아폴리네르가 용의선상에 떠올랐다. 아폴리네르가 ‘박물관이 예술가의 상상력을 마비시킨다며 전부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도 경찰의 판단에 영향을 미쳤다.

아폴리네르가 체포되었고, 그는 ‘도르므상 남작이라고 서명한 도둑과 접촉한 바 있고, 장물을 받았다’는 혐의(범인은닉죄, 장물소지죄 등)를 받았다. 경찰은 훔친 조각상을 구입한 화가의 이름을 말하지 않으면 아폴리네르와 가까운 모든 사람을 취조하고 가택을 수색하겠다고 경고했다. 아폴리네르는 자신과 친했던 화가 피카소의 이름을 댔다. 경찰은 어울려다녔던 ‘피카소 패거리’가 국제 미술품털이단과 연관이 있다고 보았다. 두 사람은 대질 신문을 하게 되었다. 이때 피카소는 아폴리네르를 ‘처음 보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별다른 증거가 나오지 않아 석방되었다.「모나리자」는 르네상스 미술의 정점이었고, 피카소는 현대 미술의 개척자였다. 르네상스의 정점과 현대 미술의 개척자는 이렇게 우스꽝스럽게 조우했다.

Q : 「모나리자」를 훔친 범인이 받은 형량이 7개월9일뿐인 이유는?

A : 1913년 12월. 피렌체의 미술상 알프레도 제리가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보낸 이는 ‘레오나르도’라고 적혀 있었다. 1913년 11월29일자 소인이 찍힌 이 편지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도난 작품을 내가 갖고 있고, 화가가 이탈리아인이니 작품이 이탈리아에 있어야 할 것 같다. 이 나라에 작품을 돌려주는 게 나의 꿈이다’라고 적혀 있었다. 편지는 보낸 이의 본명은 빈센초 페루자. 루브르 박물관에서 2년 동안 유리공으로 일했던 페루자는 이탈리아 정부가 후한 포상금을 주고, 국민의 영웅으로 환호 받으며 풀려날 것으로 생각했다. 실제 그는 조국애를 강조하는 인터뷰를 여러 차례 가졌고, 그의 감방에는 격려와 선물이 쏟아졌다. 

그가 최종적으로 받은 형량은 7개월 9일. 프랑스 정부는 엄중한 처벌을 촉구하지 않았다. 어설펐던 수사의 기억을 되살리고 싶지 않았고, 이 절도범을 이탈리아의 순교자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이탈리아 또한 「모나리자」를 고국으로 되찾아온 자에게 가혹한 처사를 내리는 것이 꺼림칙했다. 게다가 재판 기간 중에 합스부르크 왕가의 후계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사라예보에서 암살당한 사건이 벌어지면서,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각각 세르비아와 오스트리아 편에 섰고 양국 관계는 급속도로 냉각되었다. 이런 정황이 빈센초 페루자에 대한 형량에 영향을 미쳤다. 

빈센초 페루자는 석방된 이후 고향 두멘차로 돌아가 영웅으로 환영받았다. 그리고 이탈리아 육군에 입대해 전쟁이 끝날 때까지 복무했다. 그러고는 프랑스로 돌아갔는데, 1947년 9월에 사망할 때까지 배후에 누가 있었는지 끝까지 털어놓지 않았다.

Q : 사건 이후 미국의 한 언론이 「모나리자」 도난 사건의 진범에 관한 기사를 썼는데?

A : 1932년 6월25일. 칼 데커가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에 ‘「모나리자」는 어떻게, 왜 도난당했는가’라는 기사를 썼다. 자기가 「뉴욕 저널」 기자 시절에 카사블랑카의 한 카페에서 발피에르노 후작에게서 사건의 전모에 대해 들었다면서, 발피에르노 후작이 「모나리자」 도난 사건의 배후 인물이라고 기사에서 주장했다. 발피에르노가 원작을 훔친 뒤 각각의 위조품을 백만장자 수집가에게 진품으로 속여 팔았다는 것이다. 누구에게도 보일 수 없고 심지어 인증을 받을 수조차 없는 작품이기에 각각의 구매자는 자신이 진짜 「모나리자」의 주인이라고 믿었다는 것이다. 발피에르노가 모든 계획을 짜고 마지막 단계에서 박물관 내부 사정을 잘 아는 빈센초 페루자를 기용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그럴 듯해 나중에 이 기사를 근거로 발피에르노에 관한 소설이 나오기도 했다(『나는 모나리자를 훔쳤다』랜덤하우스코리아 출간). 

「사라진 미소」의 저자는 이 기사의 신뢰성을 의심한다. 우선 칼 데커는 별다른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칼 데커는 황색 저널리즘의 대표격인 「뉴욕 저널」의 간판 기자였다. 미국 선박 메인호가 아바나 항구에서 폭발한 사건이 있을 때, 「뉴욕 저널」은 전쟁을 선동했다. 칼 데커는 그 자신이 직접 사건에 개입해 뉴스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런 기자가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범죄 사건의 특종을 듣고서 보도하지 않다가 20여년이 지난 후에 보도를 했다? 그리고 이 책의 저자가 찾은 결과, 칼 데커가 발피에르노에게 말을 들었다고 주장한 때 「뉴욕 저널」에는 (카사블랑카가 위치한) 모로코발 기명 기사가 한 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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