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가 밤늦도록 책을 읽는다. 마지막 장을 덮자마자 집어던진다. 창문을 깨고 마당으로 떨어진 책 한 권. 〈무기여 잘 있거라〉. 그러고도 풀리지 않은 화를 주체하지 못해 결국 남자는 부모 침실에 쳐들어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캐서린이 죽는 결말이라고요! 아니, 세상은 충분히 험난하고 힘든데, 해피엔딩 좀 쓰면 안 돼요?” “지금 새벽 4시야! 너 우리에게 사과해라.(어머니)” “전 사과할 수 없어요. 헤밍웨이를 대신해서 사과할게요. 헤밍웨이 잘못이니깐.” “그럼 우리한테 전화해서 당장 사과하라고 헤밍웨이에게 전해라.(아버지)”

영화 초반, 관객들 마음 속 굳게 닫힌 창문까지 와장창, 시원하게 깨버리는 이 장면에서 나는 영화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의 세 가지 미래를 점칠 수 있었다. 첫째, 이 남자는 앞으로도 충분히 험난하고 힘든 세상을 살겠구나. 둘째, 하지만 헤밍웨이의 소설과 달리 해피엔딩이겠구나. 셋째, 이 남자의 아버지를 닮아서 영화도 유머를 잃지 않겠구나. 다행히 내 예상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다. 예상한 대로 흘러가는 영화는 김빠지게 마련인데 왜 끝까지 흥미진진한 거지?


모두 발버둥 치고 있구나

자, 남산을 백 번쯤 오른 사람이 있다고 치자. 걸을 만한 루트는 다 걸어봤을 것이다. 이젠 늘 예상한 것만 보게 될 것이다. 하지만 오랜만에 아주 마음에 드는 그 사람과 첫 데이트라면? 익숙한 길을 또 걸어도 괜히 심장이 뛰고 괜히 기분이 들뜨기 마련. 영화에서는 ‘캐릭터’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어떤 장르의 루트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데도 이 영화를 재미있게 본 이유는 순전히 ‘오랜만에 아주 마음에 드는 그 사람들’을 만났기 때문이다.

욱하는 성질을 주체하지 못하고 바람난 아내의 불륜 상대를 죽도록 두들겨 팬 죄로 정신병원에 갇혀 8개월을 보낸 주인공 팻(브래들리 쿠퍼). 개과천선을 다짐하며 집으로 돌아왔지만 겨우 소설 한 권 때문에 창문을 깰 만큼 여전히 팻의 정신 상태는 불안하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동네 ‘미친 놈’이 이웃 동네 ‘미친 년’을 만난다. 남편의 이른 죽음이 남긴 상처를 섹스 중독으로 승화시킨 여자 티파니(제니퍼 로렌스). 다니던 회사의 모든 직원과 잠자리를 한 게 알려져 해고당한 뒤 집 밖으로 잘 나오지도 않던 여자가 언젠가부터 팻의 주변에서 얼쩡댄다. 그렇게 참 이상한 사람들의 참 요상한 로맨스가 시작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충분히 험난하고 힘든 세상’과 부딪쳐 튕겨져 나온 가엾은 캐릭터들이 영화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팻과 티파니뿐만 아니라 로버트 드니로가 연기하는 팻의 아버지도, 줄리아 스타일스가 연기하는 티파니의 언니도 알고 보면 모두가 조금씩은 미친 사람이다.

그래서 “그거 아세요? 제 인생의 먹구름을 다 걷어내고 햇살이 비치게 할 거예요!” 팻이 악에 받쳐 소리칠 때, 오랜만에 아주 마음에 드는 그 사람들 모두 발버둥 치고 있구나, 더 나빠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구나, 그러고 보니 나도 사실 그들과 다를 게 없구나, 순순히 수긍하게 되었다.

실버라이닝(silver lining)은 ‘구름의 흰 가장자리’를 뜻한다. 희게 반짝이는 구름의 테두리는 그 뒤에 태양이 숨어 있다는 증거. 그래서 ‘한 줄기 희망’이라는 뜻도 가졌다. 플레이북(playbook)은 미식축구 등에서 쓰이는 작전 노트. 31년 만에 처음으로 아카데미 남녀 주연상과 남녀 조연상 부문 모두에 후보를 올린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은, 우리 모두가 커닝해도 좋을 ‘희망 찾기 작전 노트’이자, 재치와 유머가 눈처럼 소복하게 쌓인 시나리오 위로 들뜬 남녀의 달뜬 연애담이 날렵하게 미끄럼을 타는 영화다.

기자명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