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곰 생각해보면 신기한 일이다. 주인공이 위기에 몰리는 장면으로 자막이 올라가도 다음 회에 어떻게 전개될지 뻔히 내다보일 만큼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과는 애당초 인연이 닿지 않는 단선적인 갈등 구조가 평면적으로 되풀이되는데도, 어떻든 재미는 있다. 게다가 ‘비천한 신분의 주인공이 기득권 세력의 온갖 방해를 물리치며 입지전적인 성공을 거둔다’는 식상한 스토리가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소재와 배경만 바꿔가며 재연될 뿐인데도, 물리지도 않고 번번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제는 아예 보통명사가 되다시피 한 ‘이병훈표 드라마’ 얘기다.

가장 유력한 실마리는, 이미 ‘개천에서 용이 나올 수 없는’ 시대를 힘겹게 살아내고 있는 대중의 욕망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기억에도 새롭지만, ‘이병훈표 드라마’의 원형에 해당하는 〈허준〉이 전파를 탄 때가 구제금융의 여파가 휩쓸고 지나간 뒤 신자유주의 질서로 사회가 재편되던 1998년 말이라는 사실은 꽤 의미심장하다. 어느새 그 시기가 회고의 대상이 될 만큼 그사이 대중문화의 수용 양상도 적지 않은 변화를 보였고 그에 발맞추어 드라마 트렌드도 빠르게 진화해 오기는 했다. 하지만 ‘계층 이동’의 가능성을 가로막는 현실적 장벽이 공고해질수록 그런 절망적인 현실을 부정하려는 욕망도 대중 내면에 더 깊이 더 견고하게 각인되었을 터이다. 아무리 되풀이해도 식상하지 않는 ‘걸어서 하늘까지’의 입지전은 아무리 발버둥쳐도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의 거울상이다.

그래서 이 ‘성공 판타지’는 시대극의 외연을 취할 수밖에 없다. 지금 여기에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꿈꾸는 것이라면, 시대 배경은 개연성의 부담을 덜기 위한 필연적인 장치다. 게다가 전근대 사회라는 설정은 주인공의 성공을 방해하는 온갖 극단적인 음모와 치졸한 술수까지도 그다지 억지스럽게 느껴지지 않게 하는 효과를 자아낸다. 따라서 가령 〈마의〉의 주인공 백광현(조승우)이 조선 현종 시대에 실존했던 인물이라는 역사적 사실과 이 드라마는 아무 상관이 없으며, 심지어 드라마에서 묘사되는 의술이 그 당시의 위생 상태나 의료 설비 수준에서 가능한 것인지를 고증하는 것도 실은 무의미한 일이다.

역전된 주인공과 기득권 세력의 관계

그럼에도 간과할 수 없는 지점은, 전작의 주인공들과 붕어빵처럼 닮은 백광현이 아니라 이명환(손창민)의 성격이다. 그는 주인공의 적수가 되어 50회 분량의 대작을 이끌어갈 만큼 강력하지도 않고 입체적이지도 않다. 게다가 든든한 뒷배도 없고, 전면에 나서 직접적으로 주인공을 궁지로 몰아넣을 변변한 협력자도 없다. 정성조(김창완)가 거의 유일한 뒷배이지만 틈만 나면 ‘꼬리 자를’ 궁리를 하기 일쑤이고, 강군관(서범식)을 하수인으로 부리긴 하지만 중량감이 떨어진다. 전작들에서 주인공이 기득권 세력에 포위된 채 협력자들의 크고 작은 지원을 받으며 성공에 다가갔던 것과는 달리, 〈마의〉에서는 애초에 힘의 균형이 심하게 일그러져 오히려 이명환이 온통 ‘백광현의 사람들’에게 포위되어 쫓기는 모양새다.

이와 관련해 이 드라마가 시대의 정치 지형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점도 주목할 대목이다. 가령 〈대장금〉에서 장금이 ‘주초위왕(走肖爲王) 사건’(기묘사화)에 연루되는 것과는 비중이 전혀 다르다. 적어도 드라마가 명시적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최상궁의 뒷배가 훈구대신이리라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던 것과는 달리, 예송 논쟁이 한창이던 시대의 한복판에서 정승 정성조가 서인인지 남인인지조차 분명치 않다. 이명환은 기득권 질서의 핵심이 아닐뿐더러 실은 어떻게 연루되어 있는지조차 뚜렷하지 않은 그냥 ‘악한’일 뿐이다.

그런데도 백광현이 이명환을 압박하며 성큼성큼 성공에 다가가는 과정만을 흥미롭게 지켜볼 수 있다면, 그것은 기득권 구조가 의외로 허술하다고 믿고 싶은 욕망이 투영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즉 ‘판타지의 단순화’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구조에는 눈감은 채, 예컨대 말단 사원이 사장보다는 바로 위 사수를 더 미워하는 심리처럼 누군가가 단지 나보다 조금 앞서 있는 듯 보인다는 이유로 당장 내 앞길을 가로막는 ‘악’의 실체인 양 여기는 데 익숙해져버린 황폐한 내면을 드러내는 것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뒷맛이 썩 개운치 않기는 매한가지다. 과연 부당하게 기회를 독점하는 ‘야비한 악한’들만 응징하면 얼마든지 ‘개천에서 용이 날’ 가능성이 되살아날까. 또는 나보다 잘난 것도 없으면서(또는 내게 아낌없는 협력과 지원을 베풀지 않으면서) 잘나가는 이들은 모두 부당한 기득권 질서의 떡고물이라도 챙긴 ‘마땅히 응징해야 할 악한’인 것일까.

더구나 백광현에게는 ‘각고의 노력’보다 ‘천부적인 재능’이 전작의 주인공보다 훨씬 강조되고 있다. 타고난 재능조차 없는 사람은 아예 꿈도 꾸지 말라는 뜻일까.

기자명 변정수 (미디어 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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