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만의 책. 르포집이다. 소설 같은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여서 소설보다 아프다. 3년간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발행하는 격월간지 〈인권〉에 연재했던 글을 묶었다. 코너 제목은 ‘길에서 만난 세상’. 길에서 만난 사람 19명에 대한 기록이다. 외국인 선원, 간호사, 텔레마케터, 장애인 활동보조인, 운동선수, 영화 미술감독, 청년 구직자, 드라마 보조작가 등을 만났다.
서울 마포구 망원시장에서 18년 동안 속옷가게를 운영하는 조태섭씨나 매달 1만㎞ 이상을 고속도로에서 운전하는 이승준씨의 삶은 보통사람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들이 꿈꾸는 삶을 들여다보면 그 사실은 더욱 선명해진다. 19명은 공통적으로 해고나 재계약을 염려하지 않고 일할 수 있는 인생, 하루 일과가 끝나면 동료들과 소주잔을 기울이거나 주말이면 가족들과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인생을 꿈꾼다. 하지만 작가가 만난 사람 중 조만간 이 꿈을 이룰 만한 사람은 없어 보인다.
글은 시종일관 덤덤하다. 감정이입을 자제하고 ‘보여주기’를 한다는 점이 저널리즘의 미덕과 닮았다. 현실은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절망적이다. 시간이 곧 돈인 이들을 한 명 한 명 만나기 위해 들인 공도 만만치 않았을 텐데 들인 품의 에피소드 역시 생략한다. 취재 대상을 선정하기가 가장 힘들었다. 요청해도 단번에 승낙하는 이가 드물었다.
그중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는 ‘흥기’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나도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요즘 청년들이 사회나 인생에 대한 고민이 없다고 여겼다. 우리 때야 사회적 변화가 가능하던 시대지만 요즘은 출구가 막혀 있다. 그럼에도 성실하게 살아가고 나름의 꿈과 희망을 품고 있었다.” 고시원에 사는 형오씨를 만나면서는 일종의 절망을 봤다. 성실하게 살던 사람들도 한번 나락으로 떨어지면 다시 돌아가는 게 불가능한 사회라는 걸 그의 인생이 증명했다. “이들은 희망을 갖는 것도 어렵지만 희망을 버리는 순간, 노숙자가 되는 거다.”
작가는 천국을 믿지 않는다. 고통 없는 세상이 존재한다고 믿지 않는다. 세상이 평등하다고도 믿지 않는다. 슬픔과 고통이 배냇짓과 다름없는 인간의 친구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인간의 역사가 조금씩 평등을 향해 진보해왔다고 믿는다. 기회의 평등만은 주어져야 한다는 게 오늘날까지 역사 진보의 커다란 방향이었다는 것. 아버지의 영향도 컸다. 작가가 20대 중반에 쓴 〈빨치산의 딸〉은 그의 부모 이야기를 그린 실화 소설이다. 괴물 같은 세상의 모순에 부딪힐 때마다 작가는 몇 년 전 작고한 아버지를 생각한다. 빨치산이자 사회주의자였으며 그 사회주의의 몰락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던 아버지는 ‘살아 있는 한 인간은 더 나아지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고 말했다.
작가 나이 48세. 20대의 그녀는 단순하고 명료했다. 원하는 세상과 해야 할 일이 뚜렷했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도 세상도 모르겠단다. “우리들의 삶을 벼랑으로 내모는 자본이라는 것의 실체조차 모르겠다. 이 거대한 괴물과 싸우는 방법 역시 모르겠다. 전 세계적으로 거대 자본에 의해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 벼랑으로 내몰리고 있다는 것만 확실할 뿐이다.” 〈벼랑 위의 꿈들〉과 비슷한 시기, 그녀의 세 번째 소설집 〈숲의 대화〉도 출간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