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uters=Newsis이안 매큐언은 ‘악마’ 같은 작가다.
독특한 작가가 독특한 평을 부르는 법이다. 이언 매큐언(1948~)에 대한 평들을 보라. 첫 책인 단편집 〈첫사랑, 마지막 의식〉(1975)을 출간한 후에는 ‘학교 선생처럼 생긴 사람이 악마처럼 글을 쓴다’(옵서버)는 소리를 들었다. 첫 소설집의 세계를 더 강하게 밀고 나간 〈시멘트 정원〉(1978)은 그에게 ‘엽기 이언(Ian Macabre)’이라는 별명을 선사했다. 세련된 블랙코미디 〈암스테르담〉(1998)을 읽은 어떤 이는 ‘나비의 날개를 떼어내는 아이처럼 무자비하게’(더 타임스) 우리 시대를 해부하는 작품이라고 상찬한다. 우아하고 격렬한 걸작 〈속죄〉(2001)를 출간한 뒤에는 ‘악마처럼 플롯을 짜고 천사처럼 글을 쓰는 작가’(위클리 스탠더드)라는 평가를 받는다.

물론 활기 넘치는 수사들이긴 하지만 이언 매큐언 소설의 정곡을 건드렸다고 말하긴 어렵다. 언론의 표현대로 그가 ‘악마’ 같은 작가일 수 있다면, 그것은 소설의 의식 때문이 아니라 무의식 때문이다. 말하자면 악마처럼 쓰려고 했다기보다는 악마처럼 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왜? 악마가 악마인 것은 내 안의 천사를 더럽히기 때문이 아니라 내 안의 악마를 살려내기 때문이다. 인간을 이해하지 않고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 안의 악마와 맞대결하지 않을 수 없다고 믿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그 자신 악마가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언 매큐언은 악마다. 이 말은 그가 용기 있는 작가라는 말과 같다.

이언 매큐언, 의제 품은 소설 쏟아내

이번에 출간된 그의 첫 책 〈첫사랑, 마지막 의식〉은 이 지적인 고집불통 작가가 무슨 생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는지를 짐작게 한다. 단편 여덟 편이 수록돼 있다. 그의 이력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나 나는 스물한 살에 68혁명을 경험한 작가가 20대에 쓴 작품들이라는 점을 의식하면서 읽었다. 당신들은 왜 이런 것들에 대해서 쓰지 않는가,라는 냉소적인 열정이 팽팽하다. 내면의 악마가 가장 천진하게 살아 있는 인물들을 내세워 그들을 기어이 이해하게 만들고 우리 안의 악마를 깨운다. 잊어버렸겠지만 당신도 한때 여동생과의 근친상간을 꿈꾼 적이 있지 않느냐고(〈가정처방〉), 어린 소녀를 남몰래 추행하려 한 적이 있지 않느냐고 이죽거린다(〈나비〉). 맞다. 우리는 천사가 아니다.

〈첫사랑, 마지막 의식〉 이언 매큐언 지음 박경희 옮김 미디어 2.0 펴냄
도발적인 출발이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면 안 된다. 그리고 이언 매큐언은 멈추지 않았다. 〈암스테르담〉 〈속죄〉 〈토요일〉로 이어지는 그의 최근작에서 우리 안의 악마들은 이제 사회적·정치적 층위에서 창궐한다. 그래서 그 소설들은 드물게도 의제를 품은 소설, 오래간만에 지식인의 논쟁거리가 될 만한 물건이 되었다. 이제 그는 윤리적 의제를 뇌관으로 묻어놓고 거기에 불을 붙여 소설을 타들어가게 하는 테크니션이다. 이를 ‘윤리적 상상력’이라고 부르려 한다. 필자가 오늘의 한국 소설에서 자주 만나게 되길 바라고 있는 바로 그것이다. 그런 상상력이 있어야 소설은 폭탄이 되어 공적 영역에서 터질 수 있다. 이번 책은 거물이 된 작가의 흥미로운 초기작이지만 우리에게는 너무 늦게 도착했다. 우리는 오래 전에 백민석을 읽었고, 편혜영과 백가흠도 이미 읽었다.

이 책의 본류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필자는 〈입체 기하학〉이나 〈극장의 코커 씨〉 같은 작품이 더 귀엽다. 30년도 더 지났지만 여전히 신선하다. 증조부의 일기장에서 ‘표면이 없는 평면’을 만들어내는 기하학 공식을 발견하고 이를 이용해 아내를 세상에서 사라지게 만든다는 식의 이야기(〈입체기하학〉), 성행위를 재연하는 집단 누드 퍼포먼스의 리허설 도중 한 남녀가 실제로 성행위를 해 무대에서 쫓겨난다는 식의 이야기(〈극장의 코커 씨〉)는 어디서도 읽어본 적이 없다. 확실히 우리 소설에서 흔히 만나기 어려운 저쪽 동네의 어떤 여유가 이 작품들에는 있다(사족 하나. 이 책의 원제는 ‘first love, last rites’다. 대구(對句)를 살리려면 ‘첫 번째 사랑, 마지막 의식’으로 옮기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기자명 신형철 (문학 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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