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진차가운 실용의 시대, 우리가 지킬 수 있는 마지막 예의는 ‘가짜 혈연’을 들이대며 존경과 복종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 전체가 나이나 성별에 관계없이 시민 대 시민으로 서로를 존중하는 것이다.
모두가 내뺄 여력이 없어서 마지못해 사는 것처럼 보이는 지금의 한국에서 내가 정말로 역겨워서 견딜 수 없는 것 중 하나는 어르신들이 시시때때로 불리할 때면 순식간에 생성해버리는 ‘가짜 혈연’이다. 주로 젊은 여자가 그 대상이 되는 가짜 혈연의 생성법은 다음과 같다. 뭔가 자기에게 불리하다고 여겨지면 얼른 사자후를 토하며 버럭 다음과 같은 외침을 곁들인다. “내가 너만 한 딸이 있다, 내가 너만 한 여동생이 있다, 내가 너만 한 손녀가 있다…!”

이런 분들은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주로 ‘아저씨’이다. 어리지도 않고 애교도 없고 귀엽지도 않고 마음에 없는 소리도 못하니 그들이 나를 예뻐할 리 없고,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사람과 같이 있고 싶지 않으니 되도록 그분들과 동선이 겹치는 일이 없도록 노력을 다해보지만 그래도 어쩌다 그들과 부딪칠라치면 꼭 이런 소리를 듣게 된다.

불리하면 튀어나오는 “나도 너만 한 딸이 있어!”

하지만 그럴 때마다 ‘아 그래 나도 집에 가면 저런 아버지가 계시지, 저분 말이 다 옳다’ 하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을뿐더러, 아니 나를 지금까지 양육하는 데 경제적·정신적 수고를 온전히 감당한 아버지는 집에 따로 계시건만 웬 아저씨가 제대로 된 이야기를 나눌 생각은 않고 뜬금없이 집에 잘 계신 내 부친의 권위를 빌려다 자기 권위를 주장하나, 그저 황당할 따름이다.

난 나 그림
물론 이전처럼 공동체의 단위가 작을 때는 이러한 호통이 지금처럼 황당하거나 우스운 말은 아니었으리라. 그러나 그런 시절의 권위는 혈연관계가 없더라도 아버지나 할아버지, 혹은 삼촌이나 오빠로서의 구실을 어느 정도 수행한 이들에 의해 정당하게 획득된 것이었다. 지금의 한국 사회처럼, 생판 남으로 살다가 갑자기 추워지면 입는 점퍼처럼 필요할 때 얼른 주워 입는 권위가 아니었다. 작은 공동체에서 모두가 본이 되어야 할 어른이라는 자리에서 남의 아이도 내 아이처럼 생각하던 시절의 권위를, 오로지 남보다 내가 잘 먹고 잘살기만을 기원하고 남의 자식보다 내 자식이 모든 면에서 뛰어나 부려 먹히지 않고 부려먹기만을 간절히 바라는 것을 모두가 뻔히 아는 오늘날 자기가 필요할 때면 얼른 부활시키려고 하는 것을 볼 때면 안쓰럽기까지 하다. ‘아니 왜 이러십니까. 저를 자식처럼 아끼지도 않으면서 왜 부모처럼 존경받으려고 하세요? 우리 공평하게 합시다, 공평하게.’

자기 말의 정당성을 입증해 보이거나 자기가 존경받을 만한 증거를 빈약하게도 ‘내가 너만 한 딸, 여동생, 손녀가 있다’는 말로밖에 내세우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 그냥 말도 섞기 싫어져서 ‘아, 예예 그러세요’ 하고 싶으니 실로 슬픈 일이다. 슬프지만, 씨족 사회는 끝났다. 작은 공동체 시대도 끝났다. 어른이 뭉쳐서 아이를 돌보고, 아이는 어른의 보호를 받으며 또 어른이 되어가고 다음 세대를 길러내던 때는 지나갔다. 우리가 사는 차갑기 짝이 없는 실용의 시대, 어차피 지금 우리가 지킬 수 있는 마지막 예의는 가짜 혈연을 들이대며 어거지로 존경과 복종을 획득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 전체가 나이나 성별에 상관없이 서로를 시민 대 시민으로 존중하는 것이 합리적이고도 건전한 길이다. 그러므로 일면식도 없는 아가씨에게 갑자기 다스 베이더처럼 ‘내가 네 애비’라며 앙탈들 좀 하지 말고 부디 좀 어른답게들 구셨으면,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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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명 김현진 (에세이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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