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주인공이 악당을 응징해도 도무지 통쾌한 맛이 없다. 스펙터클이 보잘것없어서는 결코 아니다. 주인공이 위기에 빠져도 가슴 졸이게 하는 긴장감이 없다. 몇 달 전 〈아랑사또전〉의 쏠쏠했던 재미를 되살리자면, 도사라는 설정이 허황해서도, 권선징악의 스토리가 진부해서도 전혀 아니다. KBS2 수목 드라마 〈전우치〉는 무엇이 모자라기에 화려한 볼거리와 코믹한 캐릭터들이 주는 적잖은 잔재미에도 이리 밋밋한 것일까.

실마리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굳이 고전소설의 주인공을 불러낼 이유가 과연 무엇이었을까. 제작진이 밝힌 기획 의도는 이렇다. “힘없고 핍박받는 백성들의 답답하고 억울한 현실을 통쾌하게 풀어내며, 한바탕 웃음과 시원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할 것이다.” 그래서 “약한 자들에게는 기꺼이 친구가 되어주지만 부패한 권력자에게는 가차 없고, 백성이 두렵지 않은 자들에게 백성을 대신해 혼내주는” 전우치를 내세운다. 그런데 벌써 중반부를 넘어서는 이 드라마에는 스쳐가는 풍경으로조차 ‘힘없고 핍박받는 백성’도, 그들의 ‘답답하고 억울한 현실’도 나오지 않는다. 그런 처지를 가장 설득력 있게 드러내 보이는 등장인물은 오히려 백성이 아니라 임금이다.

핍박받는 백성 나오지도 않아

그러니 전우치의 활약상을 아무리 뜯어봐도 ‘약한 자들의 친구’로 보이는 구석이라곤 도무지 찾을 수 없다. 혜령(백진희)에게 “아비와 오라비의 원수를 갚아주겠다”라고 약속하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 대상이 자신의 원수이기도 하기 때문이지, 그 사정이 억울하고 답답해서가 아니다. 주인공이니 악당을 혼내주는 거야 당연한 줄거리이겠으나, 그것이 누구를 대신한다는 것인지 실체가 도무지 아리송하다. 마숙(김갑수)의 탐욕으로 폐허가 된 율도국 백성의 원한을 복수한다고는 하지만, 정작 복수전이 벌어지는 땅에 사는 백성에게는 아무 상관도 없는 남의 싸움일 뿐이다. 도사들 사이의 도술 싸움에 공연히 휘말려들어 경을 치지나 않으면 그나마 다행인 셈이다.

혹시 마숙으로 상징되는 악이 승리했을 때 예견되는 참상을 보여주었다면 ‘예방적’인 차원에서 결과적으로 백성들의 삶을 구하는 셈이랄 수도 있겠으나, 어차피 아무 힘도 없는 왕이 허울뿐인 권력을 잃게 된다는 것 말고 백성에게 뭐가 어떻게 더 나빠질 수 있다는 건지 드라마 안의 맥락에서는 전혀 설명되지 않는다. 미덥지는 않으나마 “신분 차별 없는 평등한 세상을 이루겠다”라고 큰소리치는 건 오히려 마숙이다. 드라마 밖의 시청자들이야 그게 헛소리라는 걸 알겠지만, 애당초 마숙이 주인공의 반대편에 선 악당으로 설정되었다는 선험적 전제 말고는 그렇게 판단할 근거가 뚜렷하게 제시되지 않는다.

정당한 방법으로 악을 응징하는가

아니, 아주 분명한 근거가 한 가지 있기는 하다. 그것은 그가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자신의 목적(그것이 옳건 그르건, 현실적이건 허황하건)을 이루려 한다는 점이다.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을 하기엔 전우치의 캐릭터가 너무나 빈약한 반면, 마숙은 이 시대의 대중이 충분히 미워할 만한 인물인 것이다. 두말할 나위 없이 이것은 (전우치라는 인물을 통해 ‘약한 자들의 친구’를 염원했던 조선시대 민초들과는 인연이 거의 닿지 않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절차적 정당성에 관한 지극히 근대적인 관념의 산물이다. 다시 말해 절차적 정당성을 무시하는 악당에 대한 대중의 공분을 ‘대신’해서 혼내줄 주인공이라면, 악을 응징한다는 ‘목적의 정당성’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선악의 갈등은 ‘방법의 정당성’을 축으로 전개돼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전우치는 ‘정당한 방법’으로 악을 응징하고 있는가. 도술이라는 전근대적 설정을 타박하는 게 아니다. 이 드라마의 장르가 판타지라면 그쯤은 전혀 문제 될 게 없다. 예컨대 단 한 장면이라도 충분히 악을 제압할 수 있는 도력이 있음에도 정당하지 않은 방법이라는 이유로 물러서거나 망설이다 위기에 몰린 적이 있는지를 지적하는 것이다. 즉 ‘마숙이 왜 악한가’와 똑같은 질문을 전우치에게도 던지는 것뿐이다. 도대체 전우치는 왜 선한가. 마숙의 악에 맞서 다른 누구도 아닌 그가 승리해야 할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그래서일까. 그다지 압도적이지 못한 〈전우치〉의 시청률에서 이명박 정부의 온갖 실정에도 불구하고 정권 교체에 실패한 대통령 선거 결과가 얼마간 겹쳐 보이기도 한다. 또는 더욱 의미심장하게도 “힘없고 핍박받는 백성”이라는 알맹이가 쏙 빠진 ‘무늬만 전우치’ 캐릭터에서 노동자 후보가 둘이나 나섰는데도 존재감이 미미했던 선거 과정이 어른거리기도 한다.

기자명 변정수 (미디어 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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