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대 대통령 선거가 한창이던 지난해, 월간 출판 전문 잡지 〈라이브러리&리브로〉 12월호는 국내 출판인 180명을 대상으로 대통령 당선자에게 주고 싶은 책을 조사했다. 그 결과 한병철의 〈피로사회〉(문학과지성사, 2012)가 1위로 꼽혔다. “나라의 일꾼이 될 당선자가 성공 위주의 사회와 성과로 재단되는 삶 속에서 국민이 얼마나 지쳤는지 돌아보기를 바라는 출판인들의 마음이 반영된 결과다”라는 잡지 관계자의 설명도 있었지만, 나는 이 책을 경멸한다.

〈피로사회〉는 다른 철학자들의 개념과 논의를 날렵한 뜨개질로 누벼놓은 ‘패스티시’(특정한 작품으로부터 내용이나 양식을 빌려온 작품)다. 예컨대 한병철은 자신의 책에서 세계화와 경제적 자유주의가 긍정성 과잉과 성과주의를 부추기며, 그것이 현대인으로 하여금 자기 징벌을 주요 증상으로 하는 우울증에 빠뜨린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지은이는 “21세기의 사회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변모했다”라는 자신의 주장을 강조하고자 미셸 푸코를 도마에 올린다. 그는 푸코가 말하는 규율사회가 ‘~해서는 안 된다’라는 부정성의 사회를 설명하는 데는 적당하지만, ‘~해야 한다’가 지배하는 오늘의 성과사회는 설명하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푸코 초기의 일망감시(파놉티콘) 이론이 ‘~해서는 안 된다’에 기초한 것은 맞지만, 후기의 푸코는 ‘통치성’이라는 개념을 가다듬으며 ‘~해야 한다’에 포박된 신자유주의 주체를 분석한다. 예컨대 당신이 아무도 보지 않는 새벽에 정차 신호를 받고 횡단보도 앞에 차를 멈추고 서 있다면, 당신은 자신의 내부에 보이지 않는 감시자를 모신 채 ‘~해서는 안 된다’라는 규율사회를 체현하는 중이다. 그런데 당신이 차를 몰고 나선 이유가 고작 금지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출근 전에 영어학원이나 헬스클럽에 들러 자기 계발을 하기 위해서였다면 다른 설명이 필요하다. 일망감시 원리가 ‘~해서는 안 된다’(구심력·-)였다면, 통치성 원리는 ‘~해야 한다’(원심력·+)이다. 이때 괄호 안에 든 통치성의 원리는 성과사회의 성과 주체가 홀려 있는 긍정성 과잉과 다르지 않다.

그들이 ‘자신을 경영하는 기업가’라고?

이 책이 번역된 직후 베를린에서 지은이와 신진욱 교수(중앙대 사회학과)가 대담을 했다. 거기서 그는 “피로사회는 ‘자신을 착취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착취하는 타인’이 없다”라고 강변했다. “피로사회, 성과사회에는 우리가 제거할 수 있는 자본가와 같은 타인 착취자가 없다. 자본가 스스로 자기 착취를 하기 때문이다. 피로사회의 희생자는 분배를 못 받은 서민만이 아니라 수입이 많은 매니저, 교수들이다. 적은 양의 파이를 차지하는 대다수만이 아니라 가장 많은 양의 파이를 차지하는 소수도 희생자이다”라는 것이다. 그래, 이재용이나 정용진도 밤을 새워가며 자기 착취에 매진하는 성과 주체겠지. 그런데 ‘통큰 피자’나 ‘통큰 치킨’ 논란에서 보았듯이, 이들의 야근(?)은 하면 할수록 타인 착취가 되지만, 대다수에게는 그저 자기 생존을 위한 몸부림일 뿐이다.  
 

자기 착취란 성공에 대한 심리적 압박감에서 오는 몫이기보다, 구조의 산물이다. 내가 자주 들르는 구립 도서관 화장실 출입구에는 환경미화원의 사진과 이름이 적나라하게 공개된, 시간별 임무 일정표가 붙어 있다. 아무리 직업에 귀천이 없다지만, 구립 도서관 화장실 청소를 가문의 영광으로 여길 사람은 없을 것이다. 몰상식한 ‘신상 털기’와 임무 일정표는 환경미화원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 효율을 높이려는 고용주의 필요에서 나온 것이지, 성과 주체의 자기 착취 열정에서 나온 착상이 아니다. 그럼에도 한병철은 그들을 가리켜 ‘자신을 경영하는 기업가’라고 부른다. 

지은이에게 성과사회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아니라, 자기를 향한 강박적인 착취가 벌어지는 사회다. 이런 분석틀에서는 아예 시스템의 지배자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시스템에 대항할 ‘우리’가 형성되지 못하며, 따라서 저항이나 혁명도 불가능해진다. 이런 논리가 초토화시키는 것은 계급적·인종적·성별 차이(적대)를 포함한 온갖 종류의 정치다.

공교롭게도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돌베개, 2011)와 한병철의 〈피로사회〉는 2010년 프랑스와 독일에서 각각 출판되어 그해의 베스트셀러가 됐다. 그런데 두 책의 주장은 완전히 딴판이다. 스테판 에셀의 책은 워낙 제목이 강렬해서 ‘분노하라’는 선동만 기억되기 십상이지만, 정작 지은이가 당부하고자 했던 것은 ‘연대하라’였다. 반면 한병철은 성과사회에서는 타인과의 연대가 불가능할 뿐 아니라, 분노조차 생기지 않는다고 말한다. 분노는 상황을 중단시킨 자리에서 현재와 미래를 전체적으로 조감할 수 있어야만 생겨나는데, 활동 과잉과 속도에 전 현대인에게는 순간순간에 대응하는 짜증과 신경질만 는다. 

우울증, 과잉행동장애, 경계성 성격장애, 소진증후군 같은 신경증에 만연된 성과사회의 해결책은, ‘~해야 한다’라는 활동 과잉과 긍정성을 내려놓고 자신을 무장해제하는 것이다. 마치 여섯 날을 일하고 일곱째 날 일손을 내려놓은 신이 쓸데없는 짓을 한 것이 아니었듯, 인간 역시 무위 속에서 비로소 계산 이상의 사유 능력을 키울 수 있고 타인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결론은 지은이의 짜깁기 능력을 새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거니와, 성과 주체의 내면이 아니라 외부로부터의 착취 구조를 외면하는 개개인의 무장해제는 요즘 유행하는 ‘힐링’에 그칠 공산이 크다. 무위 속에서 심신의 피로를 푼 개인 혹은 공동체는 심기일전해 자기를 착취하는 사회 속에 다시 뛰어든다.

〈피로사회〉 저자의 짜깁기 능력

댄 하인드의 〈대중이 돌아온다!〉(마티, 2012)는 한병철이 열거한 각종 신경증은 물론이고 자기 계발, 약물 의존, 긍정적 사고 훈련에 몰두한 성과사회의 원인을 자유시장 이데올로기와 통치제도의 구조에서 찾으면서 “고용 불안으로 우울증과 불안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처방은, 심리적·경제적 압박을 일으키는 구조적인 힘에 대항하는 것과는 전혀 무관하다”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대중이 “불안과 우울증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전히 개인적 처방에만 의존할 뿐 정치 행동이 개인의 복리를 향상시킬 수 있다는 생각”을 거의 하지 못하는 것은, 지배 이데올로기가 “‘문제’는 우리 마음속에 있다고 집요하게 주장해서 놀라운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피로사회〉가 미운 이유다.

기자명 장정일 (소설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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