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1월 고3이 되기 직전이었던 나는, 서울 마포에서 70번 시내버스를 탔다가 재미있는 장면을 보았다. 신촌을 돌아온 그 버스 안에서 술 취한 대학생 3명이 큰 소리로 떠들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은 울부짖었다.

“야, 존 레넌 죽었대, 존 레넌이 총 맞아 죽었대잖아.”

참 이상한 사실은 3~4학년으로 보이는 이른바 명문대 학생들이 왜 외국 가수의 죽음을 그리도 슬퍼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 이렇게 생각했다. ‘대학에는 저런 낭만도 있구나.’

1년2개월 뒤 그런 낭만이 있을 줄 알고 들어간 대학은, 죽음을 슬퍼하는 건 고사하고 술김에 존 레넌 노래 한마디도 부르기 어려운, 낭만이라고는 한 점도 없는 삭막한 곳으로 변해 있었다.
 

낭만적인 대학생활을 꿈꾸던 내 눈에는 이상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70학번에서 79학번까지 정확하게 3년 터울인 나의 형·누나 4명은 대학 배지를 달고 다녔다. 나도 따라하고 싶었으나 결국 하지 못했다. 배지 다는 문화가 갑자기 사라졌기 때문이다. 

1981년을 기점으로 대학생들은 존 레넌이야 죽든 말든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었고 대학 배지는 모두 내팽개쳤다. 대학으로 말하자면, 지금의 50대와 40대를 나누는 기준은 1980년이다. 1980년 광주민주화항쟁이 대학의 저항문화로 자리 잡은 것은 1981년부터였다. 대학에 국한해 본다면, 2012년 만 50세인 1962년생 81학번의 정서는 후배 세대에 더 가깝다. 근거가 있다.

정권을 탈취한 전두환 세력은 대학과 대학생, 학부모에게 두 가지 당근을 주었다. 첫째는 졸업정원제이고, 둘째는 ‘휴교 불가’이다. 1981년부터 대학 정원은 졸지에 2배로 늘어나 대학 들어가기가 쉬웠다. 무슨 일이 있어도 휴교는 하지 않겠다고 천명했다.
 

대학 사회와 문화는 순식간에 변했다. 1980년 5월 광주의 진상이 대학가에 암암리에 알려지고 그해 깨진 학생운동 세력이 재건되면서 캠퍼스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전두환 정권은 휴교를 하지 않는 대신 학내 민주화 운동을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대학축제의 쌍쌍파티 파트너를 찾아다니던 형·누나들의 70년대식 낭만도, 내가 대학에 들어가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축제는 대동제로 바뀌었다. 파트너 손을 잡고 우아한 포크댄스를 추는 대신, 동지로 돌변한 여학생과 어깨를 부딪쳐가며 ‘해방춤’을 추어야 했다.

1980년을 전후로 대학 사회의 문화와 분위기는 이렇게 명확하게 갈린다. 말하자면, 지금의 50대와 40대의 대학 문화는 1980년을 기준으로 완전히 단절되었다(1980년에는 대학들이 거의 휴교를 하다시피 했다). 문화가 칼로 무 자르듯 이렇게 갈리기는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18년 독재정권이 비극적으로 막을 내린 혼란 상황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대학에서 체험했던 선배 세대와의 문화적 단절감을, 나는 30년 만에 다시 맛보았다. 바로 지난 12월의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였다.

흔히 이번 대선의 결과를 ‘50대의 역습’이라고들 한다. 역습? 지금의 50대가, 지금과 다른 성향을 보인 적이 있어야 역습이랄 수 있을 것이다. 그 근거를 2002년 대선에서 진보 쪽으로 더 보낸 지지에서 찾기도 하는 모양이다.
 

“박근혜는 민생부터 이야기하잖아”

그러나 2002년에도 50대 투표율이 90% 가까이 될 정도로 높았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전후 베이비붐 세대가 이번에 투표장에 참 많이도 나왔다는 사실이 역습이라면 역습일 것이다. 그들은 과거의 성장 환경과, 지금 처한 환경을 가장 잘 반영한 정치 행위를 이번 투표에서 제대로 보여주었다.    

앞서 장황하게 나의 대학 경험을 이야기한 까닭은, 지금 40대와는 뚜렷하게 구별되는 한국 50대의 세대론적 정치 성향을 이야기하기 위해서였다. 지금 50대의 성향은 나이가 들어 보수화한 것이 아니다. 50대의 정치 의식은 아래 세대에 비해 예민하지도 진보 쪽으로 진화한 적도 거의 없었다. 4·19세대, 6·3세대, 386세대에 비해 유신 세대, 긴급조치 세대라는 명칭은 파괴력이 떨어진다. 1987년 6월항쟁에서도 그들은 넥타이 부대로서 후배들의 조력자였을 뿐이다. 1970년대에 대학을 다니며, 당대 청년문화를 이끌었던 대학생들도 후배들과는 많이 달랐다.

그 세대 대학생 비율도 지금의 40대에 비해 많이 낮은 10% 안팎에 불과했다. 그중에서도 진보 성향의 대학생은 소수에 그쳤고, 그 소수가 주도한 학생운동마저 사회과학으로 무장한 후배들에게 낭만적이라고 평가받았다.

 

 

 

 

“박정희 정권 말기에 부마항쟁 같은 게 있었지만, 1960년생인 우리 나이만 해도 절대 다수가 독재에 이미 순응된 상태였다. 당시에는 대학생마저도 독재정권을 비판하거나 저항하는 의식이 별로 없었다.” 79학번 선배가 내놓은 의견이다. “당시 중앙정보부에 쫓기던 여학생이 있었는데 심정적으로나마 동조한 게 아니라 ‘왜 저러고 사나’ 여길 정도였으니까.”

순응과 순치라는 것은 그 세대가 어릴 적부터 받은 정신교육에서 연유한다. 한국의 전후 세대는 직접 경험했든 아니든 굶주림이 무엇인가를 아는 세대이다.

“나는 1954년생으로 전후 세대이다. 우리는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비록 우리는 덜 굶었으나 배고픔의 공포에 대해서는 아버지에게 들어 잘 안다.” 자신을 늙은 50대라고 소개한 한아무개씨 말이다. 그들은 아버지 세대가 일제강점기에 받은 것과 비슷한 정신교육을 학교에서 받으며 자랐다. 

50대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민족주의·국가관·안보관 등의 교육을 지속적으로 가장 짜임새 있게 받은 세대이다. 물론 그 교육의 대부분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집권기에 이루어졌다. 50대의 맨 끝에 있는 나만 하더라도 고교 1학년 때까지 유신 교육을 제대로 받았다. ‘박정희 키즈’를 만들기 위한 집요하고 철저한 정신교육이었다. 우리는 맞아가며 배웠다.

월요일 아침마다 애국조회를 했다. 매일 아침 교문에 들어설 때마다 “충성!”을 외치며 태극기를 향해 거수경례를 했다. 나는 소리가 작다고 겨울 등굣길에 따귀를 얻어맞았다. 베트남과 전방의 국군장병 아저씨들에게 위문편지를 썼고, 국민교육헌장 363자를 달달 외며 반공 글짓기를 하고 포스터를 그렸다. 이승복 어린이는 우리의 영웅이었다. 매일같이 국기에 대한 맹세를 했으며, 국기 하강식 때는 가던 길을 멈추고 경례를 했다. 10월 유신을 지지하는 하얀 흉패를 까만 교복 왼쪽에 달고, 10월 유신은 한국 상황에 가장 적합한 한국적 민주주의라고 배웠다.

“어릴 적에 받은 정신교육이 우리 세대에 어마어마한 집단 무의식으로 흐르고 있다. 이것은 적절히 자극만 하면 불시에 튀어나온다.” 앞서 언급한 79학번 선배의 말이다. “대학에 가지 않은 고향 친구들에게 박정희라는 이름은 절대 비판할 수 없는 터부이다. 친구들에게 박정희는 그렇게 각인되어 있다.”

대선에서 50대가 보인 박근혜 후보에 대한 지지의 많은 부분은, 그이의 이력과 역량보다는 그이가 지닌 이미지와 상징성에서 연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박 후보는 아버지 시대의 추억을 환기하면서 그 시대에 대한 향수와 ‘경제성장’ ‘안보 튼튼’이라는 키워드로 50대의 ‘집단 무의식’을 자극한 것이다.

50대 초반의 다른 선배는 ‘묻지 마 투표’를 했다고 했다. 그에게 “유신 때 데모한 걸로 아는데 어찌 박 후보를 지지했느냐?”라고 물었다. 그는 말했다.

“아, 됐고. 난 이번에 무조건 박근혜야. 노무현 밀었더니 친노니 뭐니 갈라져서 싸움질이나 하고 민생은 뒷전이었잖아. 이번에 되면 안철수 챙겨야지, 이정희에게도 나눠줘야지, 싸움하다가 민생은 언제 챙기겠어? 그런데 박근혜는 민생부터 이야기하잖아. 한 번 더 속는 셈 치지, 뭐. 더 이상 묻지 마.” 그 선배에게 두 후보의 선거 공약은 별 의미가 없다. 개혁과 진보에 대한 불안과 불신이, 박 후보에 대한 무조건적인 투표로 연결된 것이다.    

한국의 50대가 처한 상황과 그들이 지닌 불안감에 대해서는, 대선 이후에 나온 여러 분석을 통해 널리 알려진 편이다. 그들은 부모를 부양하는 마지막 세대인 동시에 자기들은 부양받지 못하는 세대이다. 자녀에 대해서는 대학 등록금·취직·결혼까지 뒷받침해야 한다. 선배들처럼 정년이 보장된 것도 아니고 아파트 값은 자꾸 떨어진다. 노후 대책도 또렷한 게 없으니 갈수록 불안하다. 

하우스푸어니 뭐니 하며 끊임없이 불안에 내몰리는 50대에게 정교한 선거 공약이 귀에 들어올 리 없다. 건강보험 문제 하나만 놓고 보아도 “친구 100명 중 1명도 여야 후보 공약이 어떻게 다른지 모른다”라고 50대 후반에 이른 한 남성은 말했다. 그는 한마디로 정리했다. “50대는 정말 피곤하거든.”

피곤한 그들에게는 논리적인 선거 공약보다는 정서적인 호소가 잘 먹혀든다. 지금은 피곤하고 불안하니, 큰 변화도 싫고 예전처럼 단순하게 중단 없이 전진하며 살고 싶을 뿐이다. 박 후보의 마지막 구호 ‘다시 잘 살아보세’는 거기에 부응하는 최종병기였다. 〈잘 살아보세〉라는 노래에 익숙한 세대의 정서 한복판에 꽂아 넣은 돌직구인 것이다 .

그런 그들에게 통하는 것은 이정희가 따발총처럼 쏘아댄 ‘6억원’ ‘유신독재’ ‘다카키 마사오’가 아니다. ‘국기에 대한 경례 왜 안 해? 애국가는 왜 안 불러?’ 같은 우직한 대포 한 방이 훨씬 효과적이다. 어릴 적 받은 교육 효과로 인해 50대는 민족주의로 단단히 무장되어 있다. 50대가 중시하는 민족주의란 요즘 유행하는 애국주의와 유사하다.

이번 결과를 두고 50대의 역습이라고 한다면, 젊은 세대의 신무기에 대한 역습이라는 표현이 적당할 것이다. 18대 대선은 트위터니 SNS니 하며 역사상 가장 뜨거운 인터넷 온라인 선거였다. 언론도 여기에 덩달아 춤을 추었다. SNS 여론에는 유독 관심을 많이 보였다. 소외층이 생겨났으니, 바로 50대이다.

‘얘들 봐라?’ 하는 억하심정이 생겨날 법하다. 그리고 ‘투표율을 높이자’는 구호가 인터넷을 뒤덮자 ‘그래? 내가 높여주마!’ 하며 아무도 예상 못한 카운터펀치를 조용히 날렸다. 문재인 지지자들은 말이 많았으나, 박근혜 지지자들은 말이 별로 없었다.

나는 50대의 적극적인 투표 행위가, 2012년 초에 강력하게 등장했던 ‘쎄시봉 현상’과 유사하다고 본다. 쎄시봉의 통기타 문화에는 50대의 낭만과 추억이 서려 있다. 우리에게도 고유의 문화가 있다, 우리는 지금도 청바지를 입을 수 있는 영원히 낭만적인 청년이다, 우리에게도 한 방이 있다…. 그들은 쎄시봉 현상을 만들며 이 같은 점을 즐기고 확인했다. 50대는 자기들끼리 교신하며 김어준의 메시지를 전파했을 터이다. “쫄지 마!”

세상살이가 피곤하고 불안할 때면 쎄시봉 같은 복고문화가 힘을 얻게 마련이다. 현실이 괴로우면 과거는 상대적으로 풍요로워 보인다. 정서적으로는 넉넉하고, 경제적으로는 성장만 거듭했으니 그 시절에는 불안이 없었다고 여길 법하다. 과거는 흘러간 게 아니라, 복고문화를 통해 아름답게 복귀한다.

박근혜 후보는 바로 그 같은 복고문화의 가장 큰 수혜자로 보인다. 50대의 욕망이 복고를 향해 분출된 것이다. ‘다시 잘 살아보세’는 베이비부머에게 필살기였다.

 

기자명 토론토·성우제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sungwooj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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