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든 여름이었다. ‘글쓰기’라는 걸로 밥벌이를 한다는 것에 회의를 느끼던 시절이었다. 나와 후배가 썼던 책이 다른 누군가의 이름으로 출판되었고(물론 계약은 그 사람이 했지만), 그 책은 팔려나갔고, 그 사람은 그걸로 강연을 다니기 시작했다. 200자 원고지로 1400장이 넘어가는 원고에 글 한 자 보태지 않았는데도 저자인 척 행세하는 모습을 보면서 멍해졌다. 도무지 감정이 일어나지 않았다. 무덤덤했다. 글 쓰는 데 지쳐서였을까, 아니면 글을 써서 먹고산다는 것에 회의가 들어서였을까? 도무지 뭔가가 써지지 않던 여름이었다. 자질구레한 마감 일정이 압박하던 그때, 무작정 떠나기로 했다. 가방에 티셔츠와 옷가지를 욱여넣고 전주로 내려갔다. 술 마시고, 산책하고, 시답잖은 소리나 하고….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활자 자체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책 한 권 들고 나오지 않았던 내가, 나흘이 지나자 슬슬 금단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내 발은 이미 한 중형서점의 문턱을 넘고 있었다. 오토모 가쓰히로의 〈아키라〉를 연상케 하는 표지가 눈에 들어왔다. 〈제노사이드〉였다(표지 디자인의 중요성을 다시금 확인했다). 이틀 걸렸다. 신인류의 출현! 그리고 이 신인류를 죽이기 위한 인류의 노력!  700쪽 가까운 이 책을 읽고 첫 번째 든 생각은 ‘도대체 이 소설을 쓰는 데 얼마나 걸렸을까’였다. 작가로서 가지는 묘한 열등감이랄까? 정신없이 검색엔진을 돌렸고, 첫 기획에서 시작하면 25년, 집필에만 6년이 걸렸다는 정보를 확인했다(이어지는 안도의 한숨). 워싱턴 DC의 의사결정 구조와 용병회사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 해박한 생화학적 지식 등등. 대단한 건 작가가 이 모든 것에 대한 경험이 전무했다는 점이다(모두 자료조사를 통한 간접경험으로만 집필한 것이다).

끝이었다. 이 책을 읽고 난 뒤 나는 짐을 쌌다. 글이란 재미있는 것이고, 재미있는 글을 쓰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노력은 해봐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분하지만 〈제노사이드〉는 재미있었다. 정말 재미있었다. 그날로 서울로 올라온 나는 영화사를 찾아가 시나리오 계약을 진행했다. 다카노 가즈아키는 자기만의 글을 쓰기 위해 극본가의 길을 접고 소설가로 나섰지만, 각자의 상황이란 게 있지 않은가? 나도 조만간 극본가의 길을 접을 수도 있겠지만, 당장은 재미있는 이야기라면 장르 불문하고 일단 써봐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제노사이드〉는 한 작가의 방황을 끝내게 해준 작품이었다.

기자명 이성주 (문화콘텐츠 창작자·인터넷 필명 ‘펜더’)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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