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환씨는 뭐 하는 사람이에요?” 뭇사람과의 새로운 만남에서 흔히 듣는 이 질문은 항상 말문이 막히게 만든다. 나는 이 질문에 선뜻 대답을 한 기억이 단 한 번도 없다. 내 정체성이 모호해서일까? 잠시 머뭇거리면서 “아! 저는 시각예술가입니다.” 그러면 “무슨 작품 하세요?” 하고 다시 묻는 게 보통. 그러면 나는 그때부터 “저는 그림도 그리고요. 퍼포먼스도 하고요. 영상도 만들고요. 기획도….” 주저리주저리 횡설수설로 변한다. 그런데 그걸로도 나를 설명하는 게 부족하다 싶어 하나 더 얹는다. “서울시나 다른 공공기관에 문화정책 조언이나 혹은 사업심사도 하고 그래요.”

최근에는 최대한 축약해서 설명하기 위해 “저는 요즘 행정 아트를 합니다”라고도 해본다. 하지만 이렇게 대답해도 ‘행정 아트’가 뭔지 한참을 설명해야 할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나의 정체(?)를 더 의심받는 경우가 많다. 

행정 아트? 국어사전을 살펴보면, 행정은 ‘법 아래에서 국가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행하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국가 통치작용’이라 씌어 있다. 옥편에는 行政의 行(갈 행)은 조금 걸을 척()에 자축거릴 촉()으로 이루어져 있고, 政(정사 정)은 바를 정(正)에 때릴 복()으로 돼 있다. 이를 직역해보니 행정(行政)이란 말은 조금 걷는 척 자축거리면서 정사를 본다는 뜻으로 묘하게도 관료주의의 냄새가 배어 있다. 특히 ‘자축거리다’의 뜻이 ‘다리에 힘이 없어 조금씩 자꾸 절면서 걷다’는 뜻이라고 하니 킥! 하고 절로 웃음이 난다.

 

ⓒ이우일 그림


또 예술(藝術, art)은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창조하는 일에 목적을 두고 작품을 제작하는 모든 인간 활동과 그 산물’을 일컫는다. 이를 한자어로 보면 藝術은 ‘재주 예(또는 심을 예)’에 ‘꾀 술’자로 꾀나 재주를 심는다는 뜻이니, 이를 모아 만든 신조어 행정예술(行政藝術)은 ‘정사를 보는 척하는 관료들 사이에 끼어(intervention)들어 책략을 심는다’는 정도로 해석해볼 수 있겠다.

예술 공간 운영하며 정책에 개입

내가 예술로 행정에 ‘개입’한 것은 2004년 오아시스 프로젝트부터다. 오아시스 프로젝트는 국고를 헛되이 낭비하는 문화부와 그에 유착된 예술권력을 문제로 삼았고, 예술인의 창작할 권리와 유휴 공간의 창조적 활용을 슬로건으로 삼았다. 하지만 더 구체적으로 행정의 내부에까지 깊숙이 개입하게 된 시기는 2007년부터일 것이다. 오아시스 프로젝트가 스(공간점거예술)을 통해 유동적인 공간을 실험한 것이라면 ‘문래동’에서는 좀 더 구체적인 지역과 도시에 대한 실험을 했다. 문래동에서 직접 공간을 운영하면서 서울시의 정책과 제도에 개입해 들어갔고, 젠트리피케이션이나 예술의 사회적 기능 등을 두고 쟁점과 해법을 찾아가고자 시도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일을 겪게 되었다. 행정이라는 밀림을 헤치며 만난 단어들은 마치 사납고도 영리한 맹수들과도 같았다. 왕복운동, 관리, 경직, 갑을, 인센티브, 안전, 규정, 점수, 주무관, 칸막이, 예산, 정산, 감사, 분기, 자문회의, 민원, 이해관계자…. 그것들은 단지 단어가 아니라 구체적인 통치행위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이고 폐해들이었다.

나는 기관의 피스톤운동에 개입해 충돌, 기만, 분절, 가공, 변형, 융합의 과정들을 겪었다. 그러한 복잡한 공정들을 거치면서 통치제도가 얼마나 견고한지, 행정이 얼마나 사나운 동물인지 깨달았다. 그렇지만 그것이 또 얼마나 허술한 논리 아래 어이없이 전개되는지도 알게 되었다. 내가 ‘개입’해서 변화시킨 것이 있나? 생각하곤 한다. 어쩌면 변화보다 파열을 기대한 것인가. 그러나 내게 ‘행정’은 작업실이고 내 작품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워워~ 하다 보니 어느덧 작업실 이야기를 19꼭지나 쓰게 됐다. 그동안 어설픈 글을 읽어주신 독자들께 감사드리며 삽화를 그려준 이우일 선생께도 두 손을 모은다.

기자명 김윤환(미술작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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