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훈각 정당 공천 심사, 삼성 특검 등을 들여다보면 이랬다저랬다 하느라 시끄럽기 짝이 없다. 보는 이의 감정이입을 가능케 하는 자기 완성의 미학은 현실에서도 중요하다. 환영일지라도 조지 클루니 같은 변치 않는 소신을 보고 싶다.
어릴 적 나의 아버지는 단도직입과 철두철미의 대가셨다. 가령 저녁 7시에 아버지와 약속을 했다 치자. 아버지는 무조건 7시 전에 약속 장소에 나오셨고, 내가 1분이라도 지각하면 호된 꾸중을 들어야 했다. 이른바 자수성가형 성공가도를 달려오신 아버지의 일대기는 이런 단호한 성격 덕분에 일종의 객관적 합리성을 얻어내기에 이르렀는데, 그러나 그렇게 엄중한 아버지의 원칙 중심주의에는 의외의 구멍이 있었다.

등산을 좋아하셨던 아버지는 주말이면 어린 나를 데리고 지방 산행을 위해 새벽에 출발하는 관광버스에 오르곤 하셨다. 그런데 새벽 4시에 떠나는 출발 시각을 아버진 도무지 지킬 생각을 하지 않으셨다. “아빠, 이렇게 늦게 가도 돼요?” “괜찮아. 설마하니 돈 내고 예약까지 한 나를 버스가 버리고 가겠냐. 우리가 갈 때까지 버스 안 떠날 테니 걱정하지 마.” 여기서 아버지는 당신이 일생을 통해 이룩한 객관적 합리성에 결정적 치명타, 곧 자기중심적 한 방을 날리게 된다. 그리고 그 한 방은 아들인 나에게 아버지라는 존재의 일관된 정체성을 허물어뜨린다. 이렇게 ‘무너진 완결성’이 지금에 와서 나에게 아버지란 대체 어떤 인물이었나 헷갈리게 만들었다.

완결성이라는 것은 참으로 얄밉고도 거대한 괴물이다. 예술 작품은 그 자체로 정서적 일관성, 이른바 시작부터 끝까지 한 가지 기조로 자기 정체성을 완성하는 성과를 이루지 못하면 관객과 소통하지 못한다. 그런데 그 소통은 특정한 논리적 개연성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관객 마음 속 깊은 곳 감성의 바다를 좌지우지하는 것이기에 더욱 무섭다. 이것이 이른바 예술의 형식적 일관성이 보는 이의 정서와 합일되는 무시무시한 현상이기에 예술의 힘은 그만큼 큰 것이 아닐까 싶다. 

난 나 그림
최근에 본 영화들이 내게 선물한 그 공포스러운 완결성은 대단했다.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의 〈데어 윌 비 블러드〉와 코엔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아카데미 수상작이니 천재 감독이니 들먹거릴 필요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한 가지 표정으로 나를 압도했다. 그 정서적 일관성은 당대 미국 사회와 탐욕·복수·살인·분노의 상관관계를 그냥 그 자체로 내 마음 속에 던져넣었고, 감독들이 내게 원했던 독해의 정법은 여타의 논리적 해설이나 탐구 없이도 강력하게 나를 지배했다.

“수단의 인종억압 정책 묵인하는 베이징 올림픽 후원하지 말라”

보는 이로 하여금 정서적으로 이입하게 만드는 자기 완성의 미학은 현실에서도 필경 요구된다. 얼마 전 미국 배우 조지 클루니가 자기가 홍보대사로 일하고 있는 시계 회사 오메가에게 중국 베이징 올림픽을 후원하지 말아달라고 요구해 화제다. 이유는 중국 정부가 이른바 다르푸르 사태, 곧 20만명 이상을 대학살하며 인종 억압 정책을 벌이는 수단 정부의 만행을 경제적 이유로 묵과하기 때문에 해당국이 개최하는 올림픽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종종 사회적 발언과 행동을 개진하는 클루니에겐 그 자신이 세워놓은 하나의 완결적 원칙이 있다.

정권 교체와 특검, 정당별 공천 심사 때문에 여기저기서 시끄럽다. 이랬다저랬다 하느라 시끄러운 데도 많다. 차라리 하나의 환영이어도 좋다. 이랬으면 끝까지 이렇고, 저랬으면 끝까지 저랬으면 좋겠다.

기자명 이지훈 (FILM2.0 편집위원·영화 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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