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양한모

신호는 갔지만 전화를 받지 않았다. ‘몇 가지 여쭙고 싶습니다. 꼭 연락 부탁드립니다’라고 남긴 문자도 헛수고였다.

최근 언론계를 강타한 ‘한국일보발 이직 사태’의 장본인인 유성식 전 정치부장은 그렇게 말이 없었다. 지난 3월7일 사표를 제출한 유 전 부장은 앞으로 청와대 정무수석실에서 일하게 된다. ‘남은 기자들’은 “이제까지 우리가 만든 정치 지면은 무엇이 되느냐. 20여 년 동안 함께 일해온 동료에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라며 격앙된 분위기다.

또 한 사람. 유 전 부장보다 며칠 앞서 사표를 내고 방송통신위원회 대변인으로 자리를 옮긴 이태희 전 정치부 차장대우는 연락이 닿았다. 한나라당을 출입하다 청와대로 발령받은 지 3일 만에 사표를 쓴 그는 “출입처 때문에 오해를 할 수도 있지만 아무 상관이 없다. 평소 진로에 대한 고민이 많았는데, 마침 안면이 있던 최시중 방통위원장 후보로부터 제안이 와서 선택하게 된 것뿐이다”라고 해명했다.

“기자로 일할 때 윤리를 위반했거나, 자리를 옮기기 위해 여기저기 뛰어다닌 적은 결코 없다. 미국 유학 시절 인터넷 미디어를 주제로 논문을 쓴 적이 있을 만큼 관심과 전문성도 있는 분야다.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것으로 생각해달라.”

 

정치 권력이 부르면 "감사합니다"

언론인의 정·관계 진출은 더 이상 새로운 뉴스가 아니다. 이미 지난 대통령 선거 때 60여 명의 전·현직 언론인이 각 후보 캠프에 둥지를 튼 바 있고, 덕분에 ‘폴리널리스트(politics+journalist)’라는 신조어까지 생겼다. 불과 며칠 전까지 공정성·객관성이 생명인 기사를 쓰다가 한순간에 특정 정치 권력 품에 안겨버리는 일도 어느 틈에 흔해 빠진 일상이 되었다.

이런 가운데 한국일보 사례가 특별히 주목되는 것은, 그 과정과 내용에서 ‘해도 해도 너무한’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미디어 평론가 백병규씨는 “공천을 신청하거나 대선 캠프에 몸을 싣는 것은 그래도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도전’이라는 점에서 좀 봐줄 만하다. 하지만 이번 한국일보 기자들의 경우에는 ‘보장된 자리’에 편안하게 가면서도, 남아 있는 사람을 조금도 배려하지 않았다”라고 질타했다. 최근 ‘공백 기간도 없이’ 각각 국무총리실과 청와대로 옮겨간 한종태 서울신문 논설위원과 김두우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의 경우도 똑같이 ‘예의 없는 사례’에 속한다.

정치권력도 예의 없긴 마찬가지다. 언론을 ‘인력시장’쯤으로 생각했다. 유성식 부장이 사표를 낸 지난 3월7일 오후, 이준희 한국일보 편집국장은 박재완 청와대 정무수석에게 전화를 걸어 “어떻게 이럴 수 있냐”라고 강력히 항의했다. 그러나 박 수석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별 문제가 없을 줄 알았다”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김동국 한국일보 기자협의회 회장은 “한 언론사의 정치부장을 데려가면서 사전에 한마디 상의를 안 한 것도 예의에 어긋나는 일인데, ‘문제가 될 줄 몰랐다’니, 언론에 대한 정권의 시각이 얼마나 오만방자한지 보여주는 것 아니겠느냐. 언론사 정치부장쯤은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데려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직급이 낮은 것도 논란거리다. 유 전 부장의 보직이 청와대 정무수석실 3급 행정관으로 알려지면서 “그렇게 굴욕을 감수하면서까지 꼭 가야 했는가”라는 탄식이 쏟아진다. 한국일보 한 기자는 “이전에는 보통 차장급이나 일반 기자가 3급으로 갔다. 유 전 부장보다 나이가 열 살 가까이 적은 김은혜 전 MBC 기자(현 청와대 부대변인)도 2급이다. 갈 때 가더라도 남은 사람의 위상과 자존심을 고려했어야 한다”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일간지 정치부 기자도 “언론사 정치부장이면 비판과 감시를 통해 청와대 정무수석실을 벌벌 떨게 만들어야 하는 위치다. 그런데 비서관도 아니고 그 밑에 일개 손발이 되러 간다니, 회사는 다르지만 같은 정치부 기자로서 모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라고 말했다. 백병규씨가 “몸값이 ‘똥값’이 된 언론인의 위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언론인으로서는 매우 굴욕적인 사건이다”라고 규정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당사자들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 한국일보 정치면의 논조와 보도 내용도 도마 위에 올라 있다. 유성식 전 부장은 사표 제출 직후 〈미디어스〉와 인터뷰에서 “정치부장 재직시 보도 내용을 왜곡하거나, 기사를 잘 써주는 조건으로 정치권에서 대가를 받은 일이 없다”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참여정부에서 언론사별 보도 동향을 분석했던 전 청와대 관계자의 견해는 다르다. 그는 “대선 때 조선·중앙·동아보다 더 왜곡과 편향이 심했던 매체가 한국일보였다”라며 이번 요직 진출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라고 했다.

열악한 노동 조건과 비전의 부재로 '이직'

 

ⓒ연합뉴스지난 2월15일 한나라당 공천심사 면접장에 들어가는 경기도 안산 상록을 출마 신청자들. 맨 오른쪽이 ‘스타 기자’로 이름을 날렸던 이진동 전 조선일보 기자다.

언론계 관계자들은 “현재로서는 언론인들의 잇단 ‘엑소더스’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 같다”라고 허탈해한다. 김동국 회장의 말대로, 그 근본 배경에는 비전의 부재와 열악한 노동조건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5년 넘게 워크아웃을 겪은 한국일보는 특히 상황이 심각했다. 조선·중앙의 절반도 안 되는 임금과 인력으로 신문을 만들어왔다. 편집국 인력은 한겨레·경향보다도 40~50명이 적은 160명 수준이다. 2007년 이후 기자 20여 명이 이런저런 이유로 회사를 떠났지만, 경영 사정으로 3년째 신입기자 공채를 못하고 있다. 이번 이직 사태와 관련해 “개인만 탓할 수는 없다”라는 반응이 흘러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국일보만이 아니다. 한국언론재단이 발간하는 월간 〈신문과 방송〉이 2006년 5월 전국 언론인 5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이직·전직 의향이 있다고 응답한 비율은 무려 42.6%에 달했다. ‘업무량이 많다’(67.4%), ‘기자의 사회적 위상이 예전에 비해 낮아졌다’(77.2%)고 생각하는 기자도 다수를 차지했다.

한겨레도 2006년 한 해 동안만 기자 20여 명이 회사를 옮겼다. 당시 노조 측은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경제 문제’ 때문에 그만두었다”라고 밝혔다. 최근의 분위기도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한겨레 한 기자는 “괜찮은 조건의 기관·기업에서 제안이 들어왔을 때 흔들리지 않을 기자가 얼마나 될지 의문이다. 더구나 이명박 시대를 어떻게 헤쳐나갈지 앞날이 막막한 상황 아니냐”라고 말했다. 서울신문 한 정치부 기자는 “낮은 월급도 월급이지만, 개혁적·진보적이라는 정치인조차 조·중·동만 찾으니 일할 맛이 안 난다”라고 토로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정이 안 좋은 건 조·중·동 역시 마찬가지다. 방송사 못지않은 대우를 해준다는 조선일보에서마저 지난해 4월부터 최근까지 기자 14명이 이직했다. 한 기자는 노보를 통해 그 이유를 이렇게 전했다. “회사를 그만두는 가장 큰 이유는 비전이 없어서라고 볼 수 있다. 일 자체가 싫은 것은 아니지만 가정을 완전히 희생하고, 사생활도 없이 10∼20년씩 일해봐도 나중에 자기에게 남는 게 별로 없다.” 젊은 기자 사이에서는 소모품처럼 쓰이다 버려지게 될 거라는 위기감과 언제까지 회사가 지켜주지는 않을 테니 그 전에 먼저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이 팽배한 것으로 알려졌다.

 

‘공급’이 쏟아지니 몸값 추락은 당연

이번 18대 총선에서도 조선일보 기자 5명이 한나라당 공천을 위해 사표를 냈다. 안기부 X파일, 신정아-변양균 게이트 특종 보도 등 ‘스타 기자’로 이름을 날렸던 이진동 기자의 한나라당행은 특히 충격이 컸다. 안산시 상록을 후보로 확정된 이 전 기자는 “기자의 구실은 ‘문제 제기’에 한정된 것이었다. 제기된 문제를 입법 과정을 통해 직접 해결하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해왔다”라고 정치권 진출 이유를 밝혔다.
 

〈일요진단〉 〈사건 25시〉 진행으로 얼굴이 잘 알려진 박선규 전 KBS 기자는 한나라당 공천 관문을 넘지 못했다.

이렇게 ‘잘나가는 기자’마저 회사를 떠나는 판이니, ‘공급 과잉-몸값 추락’은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어느 정도 연차가 됐는데 능력이 안 돼 갈 데가 없거나, 내부 권력 투쟁에서 밀려나 생존과 복수를 위해 정치권을 기웃거리는 사람’도 부지기수인데 이젠 미래가 창창한 이들마저 홀연 기자 일을 그만두는 것이다. 지난해 6월에는 허용범 조선일보 워싱턴 특파원이 느닷없이 박근혜 후보 캠프에 몸을 실어 후배 기자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최근 경북 안동에서 공천권을 따냈다.

최고의 ‘선망 직종’으로 꼽히는 방송사의 이직 사태도 놀랍다. SBS에서 7명, KBS와 MBC에서 각각 4명이 한나라당에 공천 신청을 냈는데, 이 중 KBS는 현업에서 일하다 직행한 ‘젊은 기자’가 3명이나 된다. 2004년 총선 때만 해도 이런 사례는 단 한 건도 없었다. KBS 한 기자는 “과거에는 뽑아먹을 것 다 뽑아먹고 정년이 다 돼서야 정치권에 얼굴을 내밀고 그랬는데, 이번에는 현장에서 뛰던 젊은 기자가 많다”라고 이전과 다른 분위기를 전했다.

조·중·동·방송사 출신 아니면 명함도 못 내밀어

이제는 폴리널리스트도 조·중·동이나 방송사 아니면 명함 팔 생각을 하지 않는 게 좋다. 실제로 이번 한나라당 공천에서 다른 중앙 일간지·지방 언론사 출신 가운데 최종 관문을 통과한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다. 심지어 메이저 언론사에서도 낙마자가 속출한다. 〈사건 25시〉 〈일요진단〉 진행으로 국민에게 친숙한 박선규 전 KBS 기자가 대표적이다. 서울 관악을에서 고배를 든 박 전 기자 측은 “공천 결과를 순순히 받아들인다. 이후 행보는 아직 깊이 고민해보지 않았다”라고 밝혔다. 그는 지난 2월 회사에 사표를 제출했다.

동아일보 출신의 이홍우 전 화백은 아예 1차 관문도 넘지 못하는 굴욕을 당했다. 김현일 전 중앙일보 부국장은 최종 경합까지 간 것에 만족해야 했다. 이러한 결과에 대해 정치권과 언론계에서는 “더 이상 ‘언론인 프리미엄’ 같은 것은 없다”라는 평가가 나온다. KBS 한 기자는 “박선규 전 기자의 탈락을 보고 놀라웠다. 언론 쪽에서 하도 많이 가니까 위상도 그만큼 낮아진 것 아니겠느냐”라고 말했다.

언론인의 정·관계 진출 그 자체를 비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어디서 일하든 직업 선택의 자유는 있기 때문이다. 심석태 SBS 노조위원장의 말처럼 ‘문제는 다른 직업을 선택하는 데 자신의 위치를 부당하게 이용하거나, 남아 있는 사람들의 공정성까지 의심받게 하는 경우’이다.

하지만 언론계 전반의 대체적 분위기는 이런 ‘추악한 짓거리’에 대해서마저도 온정적인 것으로 보인다. ‘유성식·이태희 기자 이직 파동’으로 분노에 휩싸인 한국일보는 오히려 예외적이다. 조선일보 한 기자는 “선택 자체를 비판하고 싶지는 않다. 가서 잘하면 문제가 없지 않나”라고 말했다. 한 언론단체 간부는 “보수 언론 기자를 만났는데, 자기 회사에서도 정·관계에 많이 갔다고 전혀 부끄럼없이 말하더라. 회사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라며 자신이 더 놀라워하기도 했다. 현직 기자가 대거 몸을 옮긴 KBS의 경우에도 ‘대체로 개인의 선택으로 이해해주는 분위기’라고 한다.

마땅한 제도적 제재 장치가 없는 상태에서 동료와 선후배마저 묵인하고 용인해주는 분위기라면 현재의 흐름은 더욱 가속화·전면화할 가능성이 높다. 박래부 전 한국일보 논설실장(현 한국언론재단 이사장)은 지난해 10월 한 토론회에서 “놀라운 속도로, 또 놀라운 수가 옮겨가고 있다. 언론과 권력이 구분 안 될 정도다. 결국 원칙없는 사회로 가고 있으며 혼란을 초래하는 것이다. 자기 직업에 대한 긍지를 높이고 스스로 장치를 만들 필요도 있는데, 현재로서는 견제 장치가 전혀 없지 않나”라고 토로하기도 했다.

모든 직종이 그렇겠지만, 나이가 들고 위치가 올라가면 미래에 대한 고민은 그만큼 더 깊어질 수밖에 없다. 40대를 바라보는 기자 역시 마찬가지다. 몇 년, 몇 십년 뒤 이 기사가 부끄럽게 읽히지 않았으면 좋겠다. 부디, 추하게 늙어가지 않기를.

 

기자명 고동우 기자, 변진경 수습기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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