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스‘삼성·SK 폐인’을 자처하는 김경환씨(위)는 이동통신 서비스를 개선하라며 반년이 넘도록 SK텔레콤과 삼성전자 사옥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휴대전화가 또 도마에 올랐다. 정보통신부는 최근 SK텔레콤의 팔을 비틀어 요금 인하 계획을 야심차게 내놓았다. 하지만 시민단체나 소비자들은 ‘눈 가리고 아웅하냐’며 볼멘소리다. 가입비나 기본 요금은 내리지 않고, 몇몇 특수 소비자를 위한 요금만 내렸다는 이야기다.  

지난 4월 벤츠를 몰고 SK텔레콤 사옥으로 돌진해 화제가 됐던 ‘벤츠 돌진남’ 김경환씨(47)의 휴대전화 항의 시위도 계속되고 있다. 추석 연휴 기간에는 고속도로에서까지 시위를 벌였다. 
 
김경환씨는 “왜 유독 한국 소비자만 비싼 대가를 치르며 이동통신 서비스를 이용해야 하는가. 전세계 어디를 둘러봐도 고가 단말기에 비싼 통신료를 강요받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정부가 기업을 싸고돌며 소비자에게 선택권을 주지 않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할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요금 인하를 주장하는 시민단체나 전문가의 문제 인식도 김씨와 크게 다르지 않다. 정우기 교수(청강문화산업대학 이동통신과)는 “소비자에게 다양한 선택권을 주고 제대로 된 경쟁구조를 만들어야 휴대전화와 관련한 해묵은 논쟁들을 끝낼 수 있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한국 이동통신 서비스는 소비자로부터 선택권을 박탈해왔다. 지난 세월 동안 정부는 통신산업 보호 육성이라는 목표 아래 소비자에게 아무런 선택권도 주지 않았고, 업체들 간의 공정한 경쟁도 허용하지 않았다.

우선 이동통신 서비스 방식을 보자. 대다수 국가에서는 GSM(유럽식 디지털 이동통신 방식)과 CDMA(미국 퀄컴 사가 개발한 확산 대역 기술을 채택한 디지털 이동통신 방식, 코드분할 다중접속) 방식을 함께 이용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CDMA 방식만 강요했다. 이미 GSM 방식이 세계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세계 최초로 한국이 어렵게 개발한 동기식 CDMA 기술을 사장시킬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한국에서만이라도 CDMA를 키워야 다른 나라에 수출할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그리고 세계 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는 CDMA 이동통신 사업자를 키운다는 명목 아래 독과점이나 다름없는 지배 사업자를 허용했다. 2001년 SK텔레콤으로 하여금 신세기통신을 인수하게끔 허용함으로써 황금 주파수라 불리는 800MHz 주파수를 한 업체가 독점하게 만든 것이다.

800MHz 주파수를 갖고 있는 이동통신 업체는 그렇지 않은 이동통신 업체에 비해 투자비가 40%나 적게 들어간다. SK텔레콤 쪽에서 보면 투자비가 적은 대신 요금을 내려 더 많은 고객을 끌어들일 수 있는 유리한 고지를 독차지한 것이다. 그러나 특정 업체가 독주하면 시장 질서를 해칠 수 있으므로 정부는 SK텔레콤의 독주 또한 용인하지 않았다.

SK텔레콤이 싼 요금을 미끼로 모든 이동통신 고객을 끌어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정부는 요금 인가제라는 칼을 빼들었다. SK텔레콤이 요금을 마음대로 책정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그로 말미암아 SK텔레콤은 요금을 더 내리고 싶어도 내리지 못하고, 다른 통신사와 비슷한 요금을 내놓는 상황이 되었다. KTF나 LG텔레콤이 800MHz 주파수를 처음부터 나누어 같이 썼다면 동일한 환경에서 경쟁할 수 있어 소비자에게도 득이 된다고 주장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뉴시스이동통신 서비스 간 가격 경쟁이 공정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한 휴대전화 요금을 내리라는 소비자의 요구는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부는 휴대전화 단말기의 공정한 경쟁도 허용하지 않아 소비자로 하여금 비싼 단말기를 쓰도록 강요한 것이나 다름없다. 정부는 CDMA 기술을 육성하기 위해 단말기 유통권마저 이동통신 업체에 주었다. 국내에서는 휴대전화를 새로 개통하거나 교체하려면 이동통신 대리점을 방문해야 한다. 단말기에 고유번호를 부여해 가입자를 식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다수 국가에서는 고유번호를 부여한 단말기 대신 휴대전화에 내장된 심카드(가입자 인증 모듈) 방식을 사용한다. 외국에서는 심카드에 가입자 정보를 담아 이 카드만 있으면 이동통신사나 단말기 종류에 상관없이 휴대전화를 바꿔가며 사용할 수 있다. 자기 휴대전화에서 심카드만 빼서 다른 사람 휴대전화에 끼워 자기 것처럼 사용할 수 있는 방식이다. 이런 심카드 방식으로 인해 외국에서는 휴대전화가 이동통신 대리점에서만 유통되는 것이 아니라 백화점이나 문구점에서도 살 수 있다. 심카드를 한 번만 구입하면 충전해서 사용하기 때문에 통신사를 바꾼다고 해서 가입비를 또 낼 필요도 없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이동통신 업체가 제공하는 휴대전화 중에서만 골라야 한다. 휴대전화 가격이 왜곡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국내 휴대전화 가격은 이동통신사와 제조업체가 협의하여 결정하는데, 양자 모두 고가의 휴대전화를 팔아야 수익을 낼 수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동통신 업체와 제조사의 ‘짜고 치는 고스톱’도 가능한 것이다.

기업들이 비싼 전화만 고집하는 이유

가입자가 포화 상태에 이른 국내 시장에서 이동통신 업체가 새로운 수익을 창출하려면 영상통화, 인터넷 부가서비스 등 기능이 다양한 고가 휴대전화가 널리 보급되어야 한다. 저가형 휴대전화는 음성 통화와 문자 메시지가 주를 이루기 때문에 이동통신사 입장에서는 부가가치를 크게 올릴 수 없다.

제조사 처지에서도 저가형 휴대전화보다는 고가형 휴대전화를 많이 팔아야 마진이 높다. 국내 휴대전화 제조업체들이 국내 시장에는 주로 고가형만 내놓지만, 해외 시장에서는 100달러도 채 안 되는 초저가 휴대전화도 출시한다. 저가 휴대전화로 세계 시장을 장악한 노키아나 소니 에릭슨 같은 업체들과 경쟁하려면 어쩔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유통구조가 폐쇄적이어서 외국 업체들이 활발하게 들어오지 못하기 때문에 굳이 마진 폭을 줄여가며 저가 휴대전화를 내놓을 이유가 없다. 그 바람에 국내 소비자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비싼 국내 단말기 위주로 골라야 한다.

ⓒ시사IN 한향란이동통신업체가 휴대전화 유통권까지 거머쥐면서 단말기 가격 경쟁도 왜곡되고 있다.
CDMA 기술과 한국 이동통신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우리 국민들은 10년 넘게 지구상에서 가장 비싼 통신 서비스를 이용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언제까지 국민들이 이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 것일까.
정보통신부는 지난 7월 새로운 통신정책 로드맵을 발표한 바 있다. 내년부터는 통신 서비스 재판매를 통해 소비자들이 기존 KT나 SK텔레콤과 같은 기간 이동통신 회사가 내놓는 상품보다 싼 통신 서비스를 쓸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다. 또 제3세대 이동통신의 경우 ‘유심카드(가입자 인증 모듈·심카드에서 진화한 카드)’ 칩만 사면, 어떤 단말기에서도 휴대전화를 쓸 수 있게 하겠다고 했다. 통신 시장의 진입 장벽을 없애 경쟁을 유도하고, 이동통신사가 주도하고 있는 휴대전화 유통시장을 개선하겠다는 의도다.

그러나 단말기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게 하는 유심카드는 WCDMA(광대역 부호분할 다중접속) 휴대전화에만 도입할 예정이다. 현재 4500만 이동통신 가입자 가운데 WCDMA 이용자는 250만명 정도다. 250만명은 이미 유심카드가 내장된 휴대전화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업체들이 유심카드에 잠금장치(록·lock)를 걸어놓았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유심카드의 본래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정보통신부는 내년 상반기에 유심카드의 잠금장치를 해제해 WCDMA 사용자의 경우 단말기와 이동통신 서비스를 맘대로 선택하게 하겠다는 입장이다. 이렇게 되면 국내외 단말기가 시장에서 자유롭게 유통돼 소비자들은 입맛대로 고를 수 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WCDMA뿐 아니라 제2세대 CDMA에도 심카드를 도입해 소비자의 선택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왜 굳이 제3세대 휴대전화 고객에게만 이런 선택권을 주느냐는 것이다. 통신업계에서는 이동통신 이용자가 제2세대에서 제3세대로 완전히 넘어가려면 10년 정도 걸릴 것으로 내다본다. 앞으로 10년이나 더 제2세대를 쓸 소비자들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현재 정보통신부의 방침대로라면 이들은 심카드 방식을 통해 단말기나 통신 서비스를 자유롭게 선택할 권리를 얻지 못한다.

ⓒ시사IN 윤무영위는 소비자의 선택권을 보장하기 위해 제3세대 휴대전화에 도입된 유심카드.
게다가 정보통신부와 업체들은 제2세대 CDMA에서는 심카드를 도입할 수 없는 것처럼 선전하면서 이런 요구를 묵살하고 있다. 정보통신부 통신이용제도팀 장석영 팀장은 “심카드 방식은 GSM에서나 가능한 것이지 CDMA 제2세대에서는 기술적으로 가능하지 않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거짓말이다. 제2세대 CDMA에서도 심카드 방식을 이용할 수 있다.

한 휴대전화 엔지니어는 “IMT2000(지상이나 위성에서 음성, 고속 데이터, 영상 같은 멀티미디어 서비스를 제공하고, 글로벌 로밍 서비스를 제공하는 유무선 통합 차세대 통신 서비스)을 추진할 당시 제2세대 CDMA 휴대전화에서도 심카드를 도입할 수 있는 기술을 갖췄다. 왜 시장에서 채택되지 않았는지는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이미 중국을 비롯한 동남아 국가에서는 CDMA 방식의 제2세대 이동통신도 심카드 방식을 이용하고 있다. 이런 상황인데도 정보통신부가 제2세대 CDMA에서는 심카드 도입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제2세대 CDMA에서 심카드 방식을 도입하지 않겠다는 정보통신부의 입장은 공교롭게도 제2세대 이동통신 고객을 제3세대 이동통신으로 옮겨 더 큰 부가가치를 남기고자 하는 이동통신 업체들의 욕구와 궤를 같이한다. 제2세대 이동통신 이용자에게 더 많은 선택권을 줘 제3세대로 옮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한다면, 현재 제3세대 이동통신 시장에 주력하는 이동통신사 처지에서는 적잖은 차질이 빚어질 수밖에 없다.
‘앞으로 통신정책은 산업 보호에서 소비자 편익 증대 쪽으로 방향을 바꾸겠다’는 정보통신부의 약속은 여전히 공염불이다.

기자명 안은주 기자 다른기사 보기 anjo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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