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성인(홍익대 교수·경제학)대선 후보들에게 수많은 결격 사유가 나타나도 국민은 크게 개의하지 않는다. 대통령이 되어서 ‘그저 밥만 먹여준다면’ 수많은 흠결에 눈을 질끈 감겠다는 것이다.
사람이 밥만 먹고 살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성경에 떡하니 큰 글씨로 적혀 있다. 돈은 잘 벌어다 주지만 잠자리가 시원치 않은 남편을 가진 아낙의 볼멘소리에 가감 없이 묻어 있기도 하다.

사람이 밥만 먹고 살 수 없다는 것은 종교가 가르치는 개인의 수행 덕목이나 가정의 윤리에 그치지 않고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물론 밥도 중요하다. 열흘 굶은 사람치고 남의 집 담을 넘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민초들이 기아선상을 헤매서야 그 사회가 제대로 유지될 리 없다. 

그러나 밥만 먹여주는 것이 다가 아니다. 사회 또는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정신적 가치가 필요하다. 충성·희생·형평·정의·봉사 같은 가치가 그것이다. 여기까지 이야기하면 혹자는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냐’고 의아해할 수 있다. 특히 도덕 선생님도 아니고 물질을 숭상하는 경제학자가 이런 소리를 한다고 혹시 필자의 학력이 날조된 것은 아닐까 하고 의심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필자는 틀림없이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나름으로 일정 수준까지 경제학을 공부했다. 그런데 최근의 경제학은 형평·정의·투명성 등 정신적인 가치가 물질적인 생산에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왜냐하면 형평성이나 정의의 가치가 훼손될 경우 사회 내의 반목과 갈등을 조정하는 비용이 커질 수 있고, 투명성이 훼손될 경우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죄수의 딜레마’가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경제학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얼치기들의 주장이 득세하면서 노골적으로 ‘그저 밥만 먹여달라’고 애걸복걸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 어떤 판사는 경제를 걱정한다며 주주 돈을 꿀꺽한 재벌 총수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또 다른 판사는 다른 사람을 두들겨 팬 재벌 총수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재벌 총수가 우리들에게 밥만 먹여준다면 무슨 짓이든 해도 좋다는 뜻이다. 경제학을 제대로 못 배운 탓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경향이 일부 못 배운 판사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국민 상당수에게서 관찰되고 있다는 점이다. 대선 후보들에게 수많은 결격 사유가 나타나도 국민은 크게 개의하지 않는다. 대통령이 되어서 ‘그저 밥만 먹여준다면’ 수많은 흠결에 눈을 질끈 감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밥 몇 술에 정신을 팔아먹는 태도는 번영하는 나라의 모습이 아니다. 지난 세기 초에 독일과 이탈리아는 산업혁명을 늦게 시작한 후발국 처지에서 급한 마음에 밥을 먹여주겠다는 감언이설에 솔깃해서 자유를 포기하고 말았다. 나치즘과 파시즘은 그렇게 등장했다. 그러나 눈앞의 이익에만 연연해했던 대가는 제2차 세계대전 패전이라는 참혹한 결과를 낳았다. 두 나라가 그 후 도덕적 가치의 재건을 중요한 국가적 과제로 인식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잿더미에서의 부흥은 기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이 있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것이다. 불필요한 사상 논쟁보다는 실용주의적 태도가 중요하다는 덩샤오핑의 명언이다. 그런데 이 말이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그저 밥만 먹여달라는 주장을 옹호하는 근거로 사용되고 있으니 이것이 웬일인가. 덩샤오핑의 말은 쓸데없는 사상 논쟁을 하지 말라는 것이지 위장 전입을 용서하라거나, 남의 돈을 훔치거나 폭력을 행사해도 그만이라는 뜻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회에서는 번영보다는 혼란이, 협조보다는 갈등이 만연할 것이기 때문이다. 밥만 먹자고 달려들어서는 절대로 선진국이 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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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명 전성인 (홍익대 교수·경제학)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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