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영 후보가 대통합민주신당의 첫 경선에서 승리한 직후다. 여의도 정가에 ‘DJ(김대중 전 대통령)가 손학규를 버렸다’라는 내용의 ‘찌라시’(정보 문건)가 돌았다. 이른바 불쏘시개 역할이 끝났다는 것이다. 소문은 삽시간에 살집을 불렸다. 손 후보의 칩거 배경에는 DJ에 대한 배신감도 크다는 내용이다. 손학규 후보 측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반응했다. 지지를 부탁한 적도, DJ가 지원한 적도 없다고 했다. 손 후보는 “말 좋아하는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일 뿐이다”라며 웃어넘겼다. 하지만 손 후보 캠프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의중이 손 후보에게 있음을 은근히 노출했었다. 소문에 과연 진실이 담겨 있을까.
DJ가 손 전 경기도 지사를 민다는 소문은 올봄부터 정가에 은밀히 퍼졌다. 여권의 상황에 실망한 DJ가 외부에서 대안을 찾고 있다는 설명과 함께였다. 그러던 차에 손학규 전 경기도 지사의 행보가 추리에 무게를 실어주었다. 지난 5월9일, 평양행 비행기를 타러 베이징 공항에 나타난 그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햇볕정책을 경기도 지사가 되기 전부터 공개적으로 지지했다”라며 노골적으로 DJ에게 구애하는 발언을 했다. 그리고 5월20일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DJ를 방문했다. 그는 6월 말 독자노선을 접고 여권 대통합에 동참했다. 이후 동교동 측에서 손 전 지사를 주목하고 있다는 징후가 포착되었다.
7월 말, 설훈 전 의원이 손학규 캠프에 상황실장으로 합류했다. 동교동계 출신 중 특정 대선 주자 캠프에 공식 합류한 것은 설 전 의원이 처음이었다. 설 전 의원이 개인 차원의 합류라고 해명했지만 추측은 몸집을 키웠다. 그는 동교동계 중에서 성골로 통하는 ‘가신’ 출신이다. 손 전 지사는 7월 말 설 전 의원의 소개로 동교동계 ‘큰형’ 권노갑 전 고문을 만났다. 동교동계 안에서 “될 사람을 밀자”는 분위기가 감지된 것도 그 무렵이다. 분위기는 동교동의 영향권에 들어 있는 민주당 의원들이 대통합민주신당에 참여하면서 확연해진 듯했다.
당시 통합에 불참했던 동교동계 출신 전 의원(민주당)은 동교동계 선배로부터 “왜 합류하지 않느냐”라는 전화를 여러 차례 받았다고 전했다. 이후 민주당 내에서 “DJ라고 다 옳지 않다”(박상천 대표)라는 비난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과거 같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김심’ 논란은 8월 말 손학규 선거대책본부가 발족하고, 김동철 의원이 비서실장에 발탁되면서 다시 살아났다. 원래 조정식 의원이 맡기로 한 비서실장에 김동철 의원이 간 게 DJ의 의중이 반영되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잇따랐다. 김동철 의원은 국민의 정부 시절 청와대 비서관을 지낸 범 동교동계 출신이며, 광주 광산구가 지역구다. 따라서 그가 손학규 후보와 호남의 가교 역할을 맡을 것이라는 추측이었다.
최근 대두된 ‘DJ의 이해찬 지지설’도 또 다른 김심 논란 가운데 하나다. 미국을 방문 중인 DJ가 출국 전 광주·전남 지역의 주요 인사들에게 이해찬 후보 지원을 요청했다는 소문이 쟁점이다. 이 후보 캠프의 윤호중 의원이 “박지원 비서실장이 광주·전남 주요 인사들과 전화하면서 ‘이 후보 쪽이 돼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한 것을 전해 들었다”라고 한 말이 기폭제가 되었다. 상대 후보들은 정치 음모라며 발끈했다. 전화를받은 당사자로 지목된 한 인사는 “말도 안 되는 소리다”라며 부인했다. 동교동계 출신인 이 인사는 비공식적으로 손학규 후보를 돕고 있다. 그의 측근은 “이런 소동들이야말로 김심이 없다는 뜻 아니냐”라고 반문했다.
하지만 정치권의 김심 논란은 그칠 기미가 아니다. 최근에는 DJ가 문국현 전 유한킴벌리 사장의 이름을 언급했다는 것만으로 문 전 사장이 화제 인물로 등장했을 정도로 김 전 대통령의 발언은 하나하나가 뉴스를 타고 있다. 정권 재창출을 위한 DJ의 열망이 강한 데다, DJ의 복심을 얻으려는 여권 후보들의 자가발전이 겹쳐지면서 김심 논란은 가을 정국 내내 계속될 전망이다. 대통합민주신당의 한 관계자는 “여권의 지리멸렬함이 이미 생명을 다한 노정객을 다시 부활시키고 있다”라며 씁쓸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