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는 없었다. 3월7일 김용철 변호사로부터 ‘삼성 떡값 검사’로 지목된 김성호 국가정보원장 내정자에 대한 인사청문회는 끝내 열리지 않았다. 김용철 변호사가 출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증인이 나오지 않아 청문회가 연기된 경우는 국회 역사상 없었다고 한다.

한나라당과 보수 언론은 일제히 ‘멍석을 깔아주니 김 변호사가 도망갔다’고 비난하고 나섰다. 하지만 청문회가 열렸다면 김 변호사가 결코 불리한 상황이 아니었다. 뇌물 사건은 증명하기도 어렵지만, 벗어나기 또한 어렵다. 김 변호사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돈을 건넸는지 정황을 정확히 밝힌다면 김 내정자의 임명도 자신할 수 없다. 사안이 심각할 경우에는 사법 처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지난해 뇌물 수수 혐의로 구속된 전군표 전 국세청장 사건은 주고받은 쪽의 주장이 첨예하게 엇갈렸다. 하지만 법원은 돈을 줬다고 주장하는 사람의 진술을 근거로 전 전 청장을 구속했다. 한 지방법원의 현직 판사는 “뇌물 사건의 경우 돈을 건넨 사람의 주장이 가장 중요한 직접 증거다. 로비 부분은 잘 모르겠지만 김 변호사가 지금껏 해온 이야기가 사실로 드러났던 점을 근거로 판단해보면 김 변호사 진술의 신빙성을 무시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김 변호사가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에 떡값 검사 명단을 제출한 것이 지난해 10월이라는 점도 유리하게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김 변호사에게 유리한 정황은 더 있다. 김 변호사와 김 내정자는 고려대 법대 선·후배로 서로 잘 아는 사이다. 1995년 12·12 사건 및 5·18 사건 특별수사본부에서 일을 같이 하기도 했다(특별수사본부장 이종찬 청와대 민정수석도 김 변호사에 의해 떡값 검사로 지목됐다). 특수3부장으로 실무를 맡았던 김 후보자는 특수2부 소속 평검사 김 변호사를 특별수사팀에 차출했다.

김 내정자는 물불 안 가리고 수사를 잘 한다고 해 김 변호사에게 신뢰가 있었다고 한다. 수사 당시 김 변호사는 쌍용 김석원 회장 집에서 비자금이 들어 있는 사과상자를 찾아냈다.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김 내정자는 “수사 능력은 인정한다. 사과상자를 찾아냈을 때도 격려해줬다”라고 말했다. 두 사람의 인연은 김 변호사가 삼성에 근무할 때도 이어졌다고 한다. 스스로 인간관계의 폭이 넓지 않다는 김 변호사가 절친한 선배를 모함할 이유가 별로 없다.

이에 대해 김 내정자는 “1997년부터는 지방의 한직을 돌아다녀 삼성의 관리를 받을 처지가 아니었고, 김 변호사는 8년 차이 나는 후배라 돈을 주고받을 관계가 아니다”라고 청와대에 소명했다고 한다. 그러나 김 변호사는 3월6일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내가 직접 돈을 건넨 김 후보자의 경우 돈을 건넨 시기를 따져보면, 일부 혐의는 공소시효가 아직 남았다”라고 말했다.

청문회는 NO, 특검 소환에는 YES
 
김 변호사에게 국회 청문회는 떡값 검사의 실체를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청문회장에서 추가 자료를 공개하거나 학교 동문을 직접 챙겼다는 이학수 부회장과 김 내정자의 관계 등에 대해 증언할 수도 있었다. 더구나 청문회장에는 김 내정자를 둘러싼 사생활 의혹 등이 쏟아져 분위기도 김 변호사에게 불리하지 않았다.

ⓒ연합뉴스아래는 지난 3월7일 인사청문회가 무산되자 퇴장하는 김성호 국정원장 후보자.
그러나 김 변호사와 사제단은 역풍을 감수하고 청문회 불참을 선택했다. 첫 번째 이유는 삼성의 불법 로비 문제가 정치 사안으로 변질되는 점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김인국 신부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청문회는 진실을 밝히는 자리가 아니라 정쟁의 자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김 변호사를 내보내지 않기로 했다. 특검팀이 수사할 의지가 있다면 언제라도 출석해 돈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건넸는지 구체적으로 진술하겠다”라고 말했다.

김 신부의 말대로 청문회가 사실 관계를 밝히는 데 효과적이지 않다는 의견이 있다. 수사에 관해 비전문가인 국회의원이 참고인을 윽박지르거나, 상대편 의원의 발언을 저지하는 말싸움을 하다 회의가 파행되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보아왔다. 1999년 ‘옷 로비’ 사건의 국회 청문회에서는 ‘앙드레 김의 본명이 김봉남이라는 것 외에는 밝혀진 것이 없다’는 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두 번째 이유는 떡값 검사 논란이 삼성 문제의 본질로 떠오르는 것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사제단 대표 전종훈 신부는 “뇌물 로비 명단의 공개는 모든 수사의 마지막 단계에서 이뤄질 일이거나 아니면 삼성 장학생의 회개와 고백을 통해 불필요한 절차가 되도록 만들 사안이다”라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김 변호사는 “로비 명단 공개는 워낙 폭발력이 커서 모든 언론이 이쪽에만 신경을 쓰게 될 것이므로 수사에 도움이 안 된다. 그리고 원수 진 사람도 아닌데 특정인을 거명하는 것은 정말 피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3월5일 기자회견에서는 김성호·이종찬·황영기 세 명으로 최소한의 인원을 공개한 것도 이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국정원장 청문회를 겨우 이틀 남기고 명단을 공개한 점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특히 청와대는 정부에 타격을 주기 위한 근거 없는 폭로라고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사제단은 사제단 대로 고민이 컸다고 한다. 개인의 허물을 감싸야 하는 것이 사제의 기본 처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극약 처방’을 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특검에 대한 불신이 컸다. 임채진 검찰총장 등 떡값 검사로 거론됐던 세 명에 대한 특검 수사는 아직 한 걸음도 떼지 못한 상태다. 삼성의 불법 로비 부분을 담당한 제갈복성 특검보는 김 변호사를 불러 진술의 신빙성을 따져보려 하지 않았다. 이용철 변호사와 추미애 전 의원 등 로비 관련 증인 조사에 의지를 보이지도 않았다. 김 변호사의 폭로를 뒷받침할 만한 구체 증거가 없기 때문이라고 선을 그어버렸다.

또 특검 수사 자체가 흐지부지될 수 있다는 절박감이 사제들을 나서게 했다는 분석이다. 김인국 신부는 “삼성이라는 비리의 핵심을 캐는 데에 적합하지 않은 분들이 사정기관의 수장으로 임명될 경우에 앞으로 삼성 수사가 올바로 진행될 것 같지 않다는 염려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사제단의 기자회견 이후 특검은 김 변호사를 소환해 정·관계 로비 수사에 적극 나서겠다고 태도를 바꿨다. 특검이 삼성 수사에 의지를 보이지 않거나, ‘삼성 장학생’ 검사가 자신의 부끄러움을 되새겨 요직을 고사하지 않는다면 떡값 검사 논란은 또다시 논란의 중심에 떠오를 가능성이 있다. 김 변호사가 지목한 삼성 장학생 검사는 40명이 넘는다고 알려졌다. 

기자명 주진우 기자 다른기사 보기 ac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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