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극이 인기다. 국민들은 이명박 후보의 계속되는 독주로 판세가 굳혀진 ‘현실정치’보다 역동적인 ‘드라마 정치’를 선택했다. 고구려를 다룬 KBS 〈대조영〉과 MBC 〈태왕사신기〉가 시청률 30%를 넘는 고공비행을 하는 가운데,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SBS 〈왕과 나〉 MBC 〈이산 정조〉 등도 인기를 끌고 있다.

인기 좋은 사극을 정치인들이 가만둘 리 만무하다. 살짝 숟가락을 얹어놓으려 안달이 났다. 정치인들이 사극 주인공의 긍정적 이미지를 차용하는 것은 오래된 습관이다. 손학규 후보가 한나라당에 있을 때 드라마 〈주몽〉에서 금와왕의 적자인 대소와 영포를 제치고 서자인 셋째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하는 것을 빗대어 ‘손주몽’을 자처하기도 했다.

이번 대선에서, 사극 밥상에 먼저 숟가락을 올린 것은 이명박 후보 쪽이다. 〈태왕사신기〉를 패러디한, 한류 스타 배용준의 얼굴에 이 후보의 얼굴을 합성한 〈이왕사신기〉를 선보였다. 국토를 넓힌 광개토대왕처럼 이 후보가 경제를 발전시켜 국운을 떨치게 한다는 것이다.

〈태왕사신기〉와 관련해 흥미로운 점은 극중 박근혜 전 대표를 연상시키는 캐릭터가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연가려의 아들로 등장하는 호개 캐릭터가 바로 그 주인공인데, 훗날 광개토대왕이 되는 담덕과 왕위를 각축한다. 호개는 제왕의 기운을 타고난 인물로 그려지며, 담덕은 왕위를 잇기에 불안한 인물이라는 비난에 시달린다.

문국현 후보 측에서 ‘자칭’한 것은 아니지만, 드라마 〈대조영〉의 권력 구도는 문 후보를 주인공으로 ‘문조영’으로 볼 수 있는 구석이 있다. 강력한 대국 당나라와 대적하는 거란족이 왕위 계승을 놓고 소란을 겪는데, 결국 대조영의 발해에 병합된다. 이 구도는 흥행 안 되는 경선을 벌이고 있는 대통합민주신당 후보와 단일화해서 유력한 이 후보와 각축하게 되는 구도와 닮아 있다.

이해찬 후보가 참고할 만한 드라마도 있다. 바로 〈이산 정조〉다. 강력한 왕 영조와 불안한 사도세자, 그리고 그들의 갈등을 뒤로하고 왕이 된 정조와 이 후보가 닮은 구석이 있어 ‘이해찬 정조’를 그려볼 수 있다. 아직도 영향력이 막강한 김대중 전 대통령을 영조에, 보수 언론의 비판에 경제를 망친 원흉으로 몰린 노무현 대통령은 당쟁에 휘말려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에 빗대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실세 총리로, 실무형 리더십을 지닌 이 후보와 실무에 능했던 정조도 닮은 구석을 찾을 수 있다.

드라마 〈왕과 나〉는 정동영 후보와 호남 세력의 정치적 역할과 비교해볼 구석이 있다. 여러 왕을 모신 김처선처럼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집권에 기여한 정 후보와 호남 세력이 계속 권력의 주체로 남을지 여부가 그것이다. 대통령의 권력 축소를 통한 ‘중통령’제를 주장하는 정 후보가 ‘왕은 나’를 실현시킬 수 있을지 관심을 모은다.

기자명 고재열 기자 다른기사 보기 scoop@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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