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산하(가명)의 아내가 병원에 입원했다. 아내는 친정 식구가 입원 기록을 보게 될지도 모르니 보호자인 산하의 주민등록번호 뒷자리를 2가 아니라 ‘1’로 고쳐 써달라고 했다. 산하는 ‘내가 왜 그래야 하느냐’며 화를 내고 고집을 피웠다. 다행히 병원에서는 남편인 산하의 주민등록번호 뒷자리가 2로 시작하는 것에 별 신경을 쓰지 않고 넘어갔다. 결혼하고 처가와 왕래하고 살 만큼 다들 산하를 남자라 생각하지만 그는 아직도 2로 시작하는 주민등록번호를 가지고 있다. 그는 트랜스젠더이다.

처음 사귀었던 여자친구의 부모가 둘의 결합을 격렬히 반대해 억지로 헤어진 뒤 산하는 가슴을 수술했다. 자신의 성 정체성과 맞지 않는 몸이 싫어서 어렸을 때는 완전한 성전환 수술을 하기 원했지만 지금은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싶다. 성전환 수술의 부작용을 걱정하며 지금 자기 모습을 그대로 사랑해주는 아내가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산하는 호적 변경을 위해 ‘성전환 수술을 할까’ 하고 아내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아내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대답했다. 여성에서 남성으로 성을 전환하는 것이,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을 전환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까다롭고 부작용도 많기 때문이다. 산하는 자기와 같은 사람에게 남자냐 여자냐, 트랜스젠더냐 레즈비언이냐를 묻고 따지는 우리 사회가 성전환 수술을 강요한다고 비판한다.

ⓒ뉴시스우리 사회는 레즈비언이냐 트랜스젠더냐를 묻고 따진다. 위는 트랜스젠더 연예인 이시연씨(본명 이대학).
물론 호적 변경을 완강히 거부해왔던 한국 정부도 ‘여자보다 더 여자 같은’ 한 연예인이 뜨고 난 이후로는 성 전환자의 호적 변경을 허용해준다. 그러나 성기 성형수술을 통해 물리적으로 다른 ‘성’으로 몸을 바꾼 경우에만 인정한다. 산하처럼 성기 수술을 하지 않은 사람은 오랜 세월 스스로를 남자라 여기면서 누군가와 ‘사실혼’ 관계를 유지하며 살았더라도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히말라야 산맥의 작은 나라 네팔의 대법원도 ‘성기 수술에 관계 없이 한 사람이 다른 성을 선택할 수 있다’고 판결하는데도 말이다.

진보 단체조차 성별을 묻는 ‘한심한 진보’

‘온전한’ 남자와 여자만 존재할 수 있는 세상에 산하 같은 트랜스젠더가 설 자리는 없다. 그러니 이들의 감수성과 인권이 존중될 리 만무하다. 성별 확인이 중요하지 않은 곳에서 일자리를 구할 때도 ‘남자냐, 여자냐’를 따지는 통에 취업을 하기도 쉽지 않다. 얼마 전까지 음식점을 경영했던 산하도 음식점 문을 열 때 아내의 이름으로 허가를 받았다.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심지어 민주노동당을 박차고 나와 새로운 진보를 만들겠다고 선언한 단체는 가입 원서에서도 아무렇지 않은 듯 성별을 물었다. 이에 분노한 산하는 이렇게 외쳤다. “그 정도 감수성으로 무슨 진보입니까? 누군가를 받아들이는 가입 원서에서조차 사회적으로 가장 소외된 사람을 다시 한번 절망하게 만들면서요.”

이런 까닭으로 산하는 지금 생업을 잠시 그만두고 한국 최초로 국회의원 출마를 선언한 레즈비언 정치인의 선거운동을 돕는 중이다. 그것은 단지 자신의 인권을 바로 지켜줄 정치가 필요해서만은 아니다. 사회 약자와의 연대를 요란하게 떠들면서도 그들에게 상처만 안겨주는 이 ‘한심한 진보’를 일깨우기 위함이다. 진보의 감수성이 무엇인지를 가르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들의 이웃이 되어준다고 여기는 것은 우리의 착각이다. 우리에게 손을 내밀고 우리의 이웃이 되어주는 것은 정작 사회적 약자인 그들이다.

기자명 엄기호 (‘팍스로마나’ 가톨릭지식인문화운동 동아시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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