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엄마는 세상에서 제일 예쁜 여자야〉라는 동유럽 동화를 접했다. 내용은 이렇다. 바랴라는 아이가 들판에서 일하던 엄마를 잃고 울고 있다. 사람들이 엄마가 누군지 설명해보라니까 바랴는 ‘세상에서 제일 예쁜 여자’라는 말만 반복한다. 아이 엄마를 찾아주기 위해 사람들은 인근의 소문난 미녀들을 데려온다. 그러나 아이는 고개만 내젓는다. 그때 달려온 한 여자. 크고 넓적한 얼굴, 뭉툭한 코, 눈은 찢어졌고 이도 거의 빠져 있는 그 여자를 보고 바랴는 ‘엄마’라며 달려간다.

동화를 읽고 가슴이 뭉클해졌다. “엄마가 제일 예뻐”라며 품속을 파고들던 우리 집 꼬맹이도 생각났다. 비록 초등학교에 입학한 뒤로는 이를 접대성 멘트로 날린다는 게 눈에 보여 탈이지만 말이다. 아이 눈에는 본시 그게 정상일 것이다. 엄마는 세상에서 제일 예쁜 사람, 아빠는 세상에서 제일 힘센 사람. 그런데 그럴 수 없는 아이들이 있다. 자신의 엄마 또는 아빠를 부정하게 만드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이다. 피부색이 다르거나 한국말이 서툴다는 이유로, 또는 가난하다는 이유로 부모가 2등 국민 취급받는 걸 보고 자란 이들이 과연 자긍심을 기를 수 있을까? 


최근 한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에 출연한 다문화 가정 여성이 화제를 모았다. 막강한 노래 실력을 지닌 그녀가 예상보다 일찍 탈락하자 혼혈에 대한 편견이 작용했다는 둥 말이 많았다. 그러나 그보다 많은 이들의 마음에 걸렸던 건 그녀의 무표정이었다. 울고 웃는 다른 참가자들과 달리 그녀는 감정의 진폭이 적었다. 감성에 호소하는 텔레비전 매체에서 이는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했다. 한 심사위원은 ‘그녀가 감정 표현에 소극적이었던 것은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아 그랬던 것이다’라고 양해를 구하기도 했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유태인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은 수용소 수감자들이 몇 주 지나면 모든 일에 무감각한 반응을 보이게 된다는 데 주목했다. 그에 따르면 이는 살아남기 위한 방어기제다. 정신적 고통이 엄청난 상황에서 그 고통을 잊기 위해 안간힘을 쓴 결과가 무감각이라는 것이다. 단, 아무리 감정이 무뎌진 사람이라도 모멸감이 쌓이면 폭발할 때가 있더라는 것이 그의 통찰이다. 분노가 터져나오기 시작하면 때는 늦다. 학교와 사회에 모두 적응하지 못한 채 방화범이 되어버린 한 혼혈 소년은 외로움을 견디기 위해 토끼를 키웠다고 했다. 어쩌면 그것이 순혈주의를 고집하는 이 꽉 막힌 사회에 던져진 ‘잠수함의 토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기자명 김은남 편집국장 다른기사 보기 ke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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