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 치니까 억 하고 죽었다’던 박종철군 고문 치사 사건 은폐 조작이 생각난다.” 5월21일 경찰청 지능수사팀이 4조원대 다단계 금융 피라미드 사기범 조희팔의 사망 소식을 발표하자 이 사건의 한 피해자는 이렇게 말했다.

경찰은 이날 사기 사건의 주범 조희팔이 지난해 12월19일 중국 옌타이 시의 한 호텔방에서 애인과 함께 주점에 다녀온 뒤 갑자기 심장마비로 쓰러져 사망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발표했다. 조씨의 시신은 중국 현지에서 화장 처리돼 가족이 국내 한 공원묘지에 몰래 묻어두었기 때문에 유전자 감식을 통한 본인 확인이 불가능했다고 경찰은 밝혔다. 그러나 다른 부수적인 자료를 토대로 사망을 확신하게 됐다는 것이다. 경찰이 조씨 사망 판단의 근거로 삼은 부수 자료는 △당시 호텔에서 한 남자가 구급차로 현지 병원에 실려갔고 △병원 의사가 이 남성의 사망을 확인한 뒤 사망진단서를 발급했으며 △시신을 화장 처리한 뒤 장례를 치르는 장면을 조씨 가족이 비디오로 찍어 최근 경찰에 제출했다는 것 등이다.

그러나 도피 중인 조희팔이 갑자기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는 경찰의 발표는 허점투성이라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문제의 인물이 조희팔이라는 확증이 없기 때문이다. 일반인 화재 사망 사건이라 해도 유전자 감식을 거쳐 본인임이 확인되지 않는 이상 섣불리 사망을 확정해 발표하지 않는 것이 상례다. 하물며 국가적인 중요 범죄인으로 인터폴 지명수배까지 해둔 조씨에 대해 경찰은 유전자 감식 같은 과학적 증거도 없이 성급하게 사망을 확인했다.


조희팔씨 가족이 동영상으로 촬영해 경찰에 제출한 조씨의 장례식 모습.

중국인 공민증 위조해 현지인 행세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조씨의 위장 사망 의혹까지 증폭되는 중이다. 각종 보험 사기 사건 등에서 보듯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엉뚱한 사람의 시신을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 둔갑시킬 수 있다. 조씨의 경우 중국에 밀항해 도피 생활을 하는 동안 거액을 들여 조선족 등 4명의 중국인 공민증을 위조해 지니고 다니면서 현지인 행세를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정황으로 볼 때 제3자의 시신을 마치 본인인 것처럼 꾸밀 수도 있지 않았겠느냐는 의혹이 제기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경찰은 주로 조씨 가족에게 입수했다는 조악하기 짝이 없는 자료를 판단 근거로 삼아 조씨의 사망이 확정됐다고 밝혔다. 이 자료는 중국 공안 당국이 공식적으로 인터폴 수배자인 조희팔이 사망했다고 확인해준 서류도 아니다. 더구나 조씨의 부인을 포함한 가족은 최근까지도 범죄 은닉자금을 국내에서 몰래 돈세탁한 다음 중국에 있는 조씨 은신처로 빼돌렸다는 혐의를 받는다. 조씨 부인으로부터 양도성예금증서(CD) 8억원을 받아 국내 은행에서 이를 수표로 바꾼 뒤 위안화로 밀반출한 적이 있다는 조희팔의 측근 김 아무개씨는 〈시사IN〉과 만나 이렇게 말했다. “조희팔의 심장으로 불리는 자금 반출 총책 김 아무개씨와 조씨의 부인이 수시로 중국에 오갔다. 부인이 1억원 단위로 CD를 자금책에게 줘 은행에서 수표로 바꿔오게 한 뒤 돈세탁해 중국에 보내는 방법을 썼다. 조금씩 바꿔서 돈이 모아지면 한 번에 30억~50억원 단위로 보냈다.” 그의 증언이 사실이라면 조씨 가족은 조희팔 다단계 사기 사건의 공범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도 경찰은 조씨 가족의 주장과 이들이 제출한 서류를 액면 그대로 믿어버린 우를 범한 셈이다.

경찰 발표가 의혹을 증폭시키는 또 다른 이유는 발표 시점 때문이다. 경찰청은 지난 4년 동안 조희팔 일당을 인터폴에 지명수배해두고도 이들을 체포·송환해오려는 실질적인 노력을 거의 기울이지 않았다. 심지어 경찰이 지명수배한 조희팔이 중국으로 밀항하던 과정에서 해경 순시선이 조씨를 서해 공해상까지 에스코트해준 사실도 드러났다. 조희팔 사건 수사팀이 속한 대구지방경찰청의 한 간부는 조희팔의 다단계 회사 압수수색 전날 조희팔과 은밀히 만나 9억원대 수표를 받은 사실이 드러나 검찰 수사 대상에 올랐다.


사기 사건 피해자들은 조희팔(위) 사망의 진위를 철저하게 검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피해자들은 조희팔이 밀항 전 이명박 대통령과 나란히 찍은 사진을 걸어두고 영업을 했다고 증언한다. 그런가 하면 조희팔의 운전기사 노릇을 했던 김 아무개씨는 수사가 시작되기 직전인 2008년 6월 조씨가 정권 실세이던 최시중 당시 방송통신위원장과 여의도 한정식집에서 만났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권력형 비호 논란이 일 만한 대목이다.


석연찮은 사망 발표 시점

이런 비호 때문에 조희팔을 일부러 안 잡는 것 아니냐는 피해자들의 원성과 비난이 들끓자 지난해부터는 대검찰청 국제협력기획단이 나섰다. 대검은 중국 공안당국과 조희팔 일당 체포 공조작업에 들어갔다. 그 결과 지난 2월8일께 중국 옌타이 시 공안은 조희팔과 함께 도망 다니던 최 아무개씨와 강 아무개씨 등 공범 수배자 2명을 체포했다.

그러자 뒷짐만 지고 있던 경찰이 다시 나섰다. 조씨 공범들이 한국으로 송환되면 이 사건 수사를 자신들이 맡겠다고 나선 것이다. 하지만 그 무렵 〈시사IN〉이 조희팔 사건 수사 책임자인 대구경찰청 수사과장(총경)이 밀항 직전 조씨로부터 9억원대 수상한 돈을 받았다는 사실을 고발 보도하면서 강한 비판 여론이 일었다(〈시사IN〉 제226호 커버스토리 참조). 피해자들의 반발에 부닥친 경찰은 이 사건 수사를 검찰에 넘겨야 했다. 현재 경찰 간부 몇몇은 조희팔과의 유착 의혹으로 인한 ‘부정처사 수뢰 혐의’로 검찰 수사 대상에 올라 있는 상황이다. 2월8일 중국 공안에 체포된 조희팔 공범 2명은 지난 5월18일에야 검찰(대구지검 서부지청)에 송환됐다. 그런데 바로 이 시점에 경찰청이 조희팔 사망 소식을 내놓은 것이다.

경찰은 앞으로 수사를 적극 벌여 조희팔이 은닉한 피해자들의 범죄 장물을 찾아내는 데 총력을 기울이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 또한 불신을 사고 있다. 현재 중국 현지에는 조희팔 다단계 사기 조직의 2인자이자 자금총책인 강태용이 숨어 있다. 강씨는 조희팔이 4조원대에 이르는 사기범죄 은닉 재산을 어디에 쓰고, 어디다 숨겨놓았는지 훤히 아는 인물이다. 경찰이 진실로 범죄 은닉자금 수사만이라도 손댈 의지가 있었다면 중국 은신처에서 조희팔의 그림자처럼 함께 지내온 2인자 강태용을 체포·송환하는 데 수사를 집중했어야 한다. 하지만 경찰은 이런 작업 대신 서둘러 확증도 없는 조희팔 사망 주장을 들고 나왔다.

이에 대해 조희팔 사기 사건 피해자들은 “1인자가 죽었으니 사실상 수사가 끝났다고 공표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라고 반발한다. 이들은 경찰이 손을 떼고 현재 수사를 진행 중인 검찰이 중심이 되어 조희팔 사건을 철저히 수사함으로써 범죄 은닉자금 환수는 말할 것도 없고 조희팔 사망 주장의 진위도 검증해야 한다고 주문하고 있다.

기자명 정희상 기자 다른기사 보기 minju518@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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