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EBS의 여행 프로그램 〈세계테마기행〉을 시작하며 필자가 첫 촬영지로 계획했던 곳은 볼리비아의 알티플라노였다. 하지만 섭외가 마무리되어가던 단계에서 알게 된 현지의 대홍수 소식에, 출발 3일을 앞두고 페루로 급하게 목적지를 변경해야 했다. 부랴부랴 비행 스케줄을 바꾸고, 동선을 다시 짜고, 예산을 점검하느라 정신을 놓기 직전인 나에게 선배 PD가 던진 한마디는 이랬다.


“좋겠네. 마추픽추도 보고.”

마추픽추. 그 말을 듣는 순간, 꽤 오랫동안 해외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며 무뎌져 있었던 설렘이 되살아났다. 초등학교 시절 〈어깨동무〉나 〈새소년〉 같은 소년 잡지에 실린 기사로 처음 접한 이래, 마추픽추는 내가 사는 현실과 UFO 사이의 경계선쯤에 존재하는 무엇이었다. 해외여행서의 대표주자 격인 〈론리 플래닛〉 영문판에 실린 마추픽추에 대한 설명은 이렇다.

 

ⓒ탁재형비를 맞으며 험난한 산길을 지나온 여행자는 마추픽추를 굽어보는 순간 할 말을 잃는다. 천년 전 잉카인들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진다.

 


“남미 대륙이라는 케이크 맨 위에 놓인 체리.”

하지만 사흘이라는 시간을 패닉에 빠져 보낸 후 비행기에 오르는 나에게 마추픽추는 달콤한 체리라기보다는 어떻게 요리를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 곰발바닥처럼 느껴졌다. 뭔가 그곳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만으로도 재미있는 소재를 찾아야 했다.

처음 생각한 것은 잉카 트레일. 칠레에서 에콰도르에 이르렀던 광대한 잉카제국을 운영하기 위해 안데스의 산중턱에 만들어진 교통로였다. 총연장 4만㎞에 달하는 이 길로 황제에게 바치는 진상품은 물론이고 황제가 각 지역의 수장들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차스키’라고 불리는 강인한 파발꾼들의 이어달리기에 의해 하루 평균 280㎞의 속도로 전파되었다고 한다. 잉카제국의 최대 판도가 남북 4000㎞ 정도였다고 하니, 수도에서 명령을 내리면 제국의 가장 변두리까지 일주일이면 전달할 수 있는 교통망을 갖추었던 셈이다.


버스를 타고 해발 4000m까지

스페인 정복자들의 침입 이후 한동안 잊혔던 이 길은 현대에 와서 페루를 찾는 여행자들이 누구나 걸어보고 싶어하는 여행 코스로 자리를 잡았다. 때로는 지상에서 500m 높이의 절벽 가운데 걸린 폭 80㎝의 길을 통과하거나, 해발 6000m의 고산지대를 넘나들기도 하는 이 길의 일부를 걷는 것만으로도, 안데스의 숨 막힐 듯한 풍광을 감상할 수 있을뿐더러 과거 잉카인들의 지혜와 강인한 체력을 느껴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기가 좋지 않았다. 1년 내내 여행자들이 끊이지 않는 잉카 트레일은 청소와 보수를 위해 해마다 2월 한 달 동안 휴장을 하는데, 하필이면 우리의 페루 방문 일정이 그때와 겹쳤다. 아쉬움과 절박함에 미칠 지경이 되어, 페이지를 찢어 먹을 기세로 〈론리 플래닛〉의 책장을 넘기던 중 조그마한 상자 기사 하나를 발견했다.

‘D.I.Y. 여행자들에게 희소식. 당신이 먼지 날리는 비포장도로와 열악한 숙소에 개의치 않는 꿋꿋한(정확히는 ‘Die-hard한’이라는 표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여행자라면 쿠스코에서 마추픽추로 가기 위해 택할 수 있는 경로가 하나 더 있다. 아브라말라가(4319m)의 버스 종점에서 자전거를 타고 출발해 정글 하이킹을 겸하는 4일간의 여정은 심장을 멎게 하는 모험의 (Heart-stopping Adventure) 시작이다….”

 

 

 

 

 

 

ⓒ탁재형잉카 트레일은 원래 황제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고대의 길이었다.

 

 

구원의 빛이 좁디좁은 이코노미 석을 환하게 비추는 느낌이었다. 쿠스코에 도착해 여행사를 탐문한 결과, 〈론리 플래닛〉의 그 기사에 실렸던 코스는 이미 ‘잉카 정글 트레일’이라는 이름으로 상품화되어 있었다.

드디어 출발 당일. 아침 일찍 쿠스코의 산티아고 버스 터미널을 출발한 로컬 버스는 굽이치는 산길을 용케도 오르고 또 올랐다. 중간에 산허리가 무너져 길이 막힌 곳을 통과할 땐 바퀴가 50㎝만 더 바깥으로 나가면 천길 낭떠러지로 추락할 지경이었다. 버스의 고도가 해발 4000m를 넘어서자, 구름이 안개처럼 버스를 덮쳐왔다. 고장난 와이퍼 때문에 앞 유리창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면 차를 세우고 차장이 치약으로 직접 물기를 닦아내기를 수차례. 드디어 버스는 아브라말라가 고갯마루를 지나 산루이스라고 하는 작은 마을에 멈췄다. 이곳에서 포장도로는 끝이 난다. 버스 지붕에 싣고 온 산악자전거로 바꿔 탈 시간이다.

쿠스코에서부터 함께 온 6명의 일행과 함께, 우리는 제법 가파른 경사로를 내리닫기 시작했다. 고갯마루에서 꽤 내려오긴 했지만 아직도 해발 3000m가 넘는 고산지대다. 코너를 돌 때마다 자전거의 제동장치에 목숨을 맡기는 기분이다. 첫 목적지인 산타마리아 마을은 해발 1200m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니 4시간 사이에 해발 1800m를 자전거로 내려가는 것이다. 

촬영장비로 가득한 배낭에 삼각대까지 메고 있어서, 험로에 자전거가 크게 요동이라도 칠라치면 무게가 집중된 주요 부위가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아파온다. 게다가 내리막길이라고는 해도 산속이다보니 군데군데 오르막이 섞여 있었다.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나와 이용택 촬영감독은 얼굴에 바른 선크림이 모두 씻겨 내려갈 정도로 땀에 흠뻑 젖고 말았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든데, 중간중간 자전거를 멈추고 촬영까지 해야 하니 (게다가 출연자를 겸해야 했던 나는 카메라 앞으로, 뒤로, 옆으로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지나가기까지 해야 하니) 이중 삼중으로 죽을 맛이었다.

 

 

 

 

 

 

 

ⓒ탁재형자전거를 타고 마추픽추로 가면 정글 하이킹도 경험할 수 있다.

 

 

두 시간쯤 달렸을까. 인가 위로 뻗은 야자수 그늘 아래 자전거를 멈추고 물병을 꺼내 입에 대는 순간, 마른하늘에서 장대비처럼 물이 쏟아진다. 담벼락 뒤에서 아주머니 한 분이 호스로 물을 뿌려대고 있다.

“으아아아아~!”

비명을 지르지 말았어야 했다. 소리를 듣고 마을 소녀들과 아낙들이 손에 손에 물이 가득 찬 대야를 들고 피에 굶주린 피라냐처럼 모여든다. 그제야 〈론리 플래닛〉에 나와 있던 경고가 머리에 떠오른다.

“주의:페루에선 2월 카니발 때 서로에게 물을 뿌리는 풍습이 있음. 지나가던 행인들의 전자제품이 파손되었다는 사례가 여럿 있었음.”

망.했.다.

물에 젖은 생쥐꼴의 여행객을 먹이로 삼는 이 마을 아낙들과의 대치가 시작되었다. 싱글벙글 웃는 표정이지만 눈은 서늘할 정도로 빛난다. 이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차피 저 방어선을 돌파해야 한다. 담벼락 아래 누워 있는 자전거는 신경도 못 쓰고, 어떻게 몸 하나 빼어 줄달음을 쳐보려 하는데, 접근할 때마다 물이 가득 담긴 대야가 하나씩 쫓아온다. 이 감독이 그 상황에서도 촬영을 계속하며 도망을 치다가, 피할 수 없게 되었을 때쯤 나에게 카메라를 넘겨준다.

‘카니발 풍습’ 물벼락 뿌리는 아낙네들

“츄악!” 그가 장렬하게 물벼락을 맞는다. 기왕 젖은 몸, 이 감독이 깔깔대며 몰려드는 아주머니들을 유인하는 사이, 나는 잽싸게 카메라를 감싸안고 방어선을 돌파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피해는 만만치 않았다. 우리는 모두 ‘빤스까지’ 젖었고, 배낭에 들어 있던 나의 디지털카메라는 서거하셨다.

가이드가 다시 적진을 뚫고 돌아가 자전거를 가져오는 사이, 장갑과 셔츠의 물을 짜내고 있는 우리에게 바로 옆집 할머니 한 분이 바나나 한 무더기를 건넨다. 엄지손가락보다 조금 더 긴, 짜리몽당하고 달콤한 바나나다. 바나나는 입안에서 살살 녹는다. 계산기가 잠시 멈추고, 이제야 이 상황이 프로그램을 위한 ‘소재’가 아닌, 내 여행 속의 풍경으로 다가온다. 머릿속의 그림 때문이 아니라, ‘그냥’ 행복해진다. 다시 자전거 위에 오른다. 내 배낭 위에는 먹고 남은 바나나 한 무더기가 매달려 있다. 뿌듯하다. 페달질에도 힘이 실린다.


둘째 날부터는 본격적인 트레킹이 시작된다. 산타마리아를 출발해 해발 1600m에 위치한 산타테레사까지 이동하는 것이다. 고산의 풍경이 계속 펼쳐지는 잉카 트레일에 비해, 잉카 정글 트레일은 상대적으로 더운 기후 속에서 걸어야 하는 데다 펼쳐지는 풍경의 변화가 적어 쉽게 지칠 수 있다는 약점이 있다. 

하지만 지칠 때쯤 나타나는 경관과 볼거리들은 충분한 보상이 되고도 남는다. 산타테레사 마을 옆에 자리 잡은 코칼마요 온천도 그런 것들 중 하나다. 아침부터 아홉 시간을 내리 걸어 슬슬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를 때쯤, 눈앞엔 우루밤바 계곡의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탁재형우루밤바 계곡 밑에 있는 코칼마요 온천.

 

 

그리고 깎아지른 절벽들 사이에 위치한 옥빛 노천 온천이 모습을 드러낸다. 많이 기울어져 열기를 잃은 태양 아래, 욱신거리는 다리 근육을 따뜻한 온천욕장에 몸을 담그는 것을 무엇에 비유할 수 있을까. 야구로 치자면 아마도 ‘끝내기 홈런’이 가장 적합한 비유가 아닐까 싶다.

그렇지만 셋째 날에는 고비가 기다리고 있다. 마추픽추를 향해 점점 다가가면서 산세는 험해지는데, 중간에 마주치는 한두 개의 인공 폭포를 제외하곤 경관이 그다지 뛰어날 것이 없다. 

게다가 어느새 나타난 철길은 의외의 복병 노릇을 톡톡히 한다. 철길 바깥으로 걷자니 바깥쪽을 향해 쌓여 있는 굵은 자갈 때문에 쉽지 않고, 침목 위를 걷자니 간격이 묘해서 스텝이 꼬인다. 그리고 가끔씩 침목 모서리에 발이 걸리면 발목이 꺾이면서 피로와 짜증이 몰려온다. 게다가 페루의 2월이면 아직 우기가 끝나지 않았을 무렵이다.

그날의 목적지인 아구아스칼리엔테스를 얼마 남겨두지 않고 구름이 모여들더니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철로변의 오두막에 잠시 들어가 비를 피해보지만, 구름 너머로 점점 가라앉고 있는 해 때문에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도 없다. 방수 재킷 위를 얼얼할 정도로 두들겨대는 빗방울을 뚫고 다시 길을 나설밖에. 하지만 그런 빗속에선 ○○텍스가 아니라 그 할아버지라고 해도 한 시간 이상을 버티기 힘들다. 몸속으로 차갑게 스며들어 오는 빗물을 느끼며, 덮어쓴 후드 위를 때리는 빗물 소리와 자신의 숨소리만을 들으며 걷는다. 우울하게 걷고 있는 우리 옆을 쿠스코와 아구아스칼리엔테스 사이를 오가는 기차가 긴 기적을 울리며 무심히 지나친다.

“제가 눈을 뜨라고 할 때까지 절대 뜨면 안 돼요.”

다음 날 아침, 밤늦게 숙소에 도착한 피로가 채 풀리기도 전에 재개한 2시간의 산행을 거쳐 나는 마침내 마추픽추가 굽어보이는 산마루 위에 도착했다. 가이드의 신신당부에 두 눈을 꼭 감은 채 그가 이끄는 곳에 섰다.

“하나, 둘, 셋! 이제 눈을 뜨세요!”

가이드의 외침에 질끈 감았던 눈을 뜨는 순간,

“…….”

그곳에 마추픽추는 없었다.

단지 내가 사흘간 그토록 갈망했고, 꿈꿨으며, 다다르기 위해 나의 온몸과 마음을 바쳐 노력했던 잉카의 공중 도시가 말없이 나를 마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엔, 오체투지까진 아니어도, 당신을 마주하기 위해 충분한 대가를 치렀고 최선을 다해 노력했노라고, 당당히 외칠 수 있는 내가 있었다. 드넓은 정글을 뚫고 지나며 자연스럽게 몸에 밴 겸손함과 경외감으로 온몸은 떨렸고, 마음은 이미 눈이 보지 못하는 풍경을 보고 있었다. 천년 전, 이곳을 가득 채웠을 잉카인들의 모습을.

탁재형/EBS의 여행 프로그램 〈세계테마기행〉을 연출한다. 그는 시청률이라는 양떼를 몰고, 아이템의 초원을 자주 떠돈다. 〈시사IN〉에 ‘술 권하는 세계’를 연재하고 있다.

잉카 정글 트레일 가는 길

페루 쿠스코에서 예약할 수 있다. 1인당 가격은 250달러 정도인데 마추픽추 입장료와 돌아오는 기차표를 포함한 금액이다. 참고로 쿠스코와 마추픽추 인근 도시 아구아스칼리엔테스 사이를 운행하는 이 기차의 1등칸 왕복 운임이 500달러, 2등칸이 200달러, 3등칸이 100달러 정도이니 (마추픽추에 관련되기만 하면 가격이 미친 듯 비싸지는 상황에서) 그리 높은 가격은 아니다. 6박7일 정도 걸리는 잉카 트레일(최근에는 잉카 정통 트레일이라 부르기도 한다)에 비해 3박4일이면 마칠 수 있고, 산악자전거와 트레킹이 결합돼 있어 인기가 높다. 또한 잉카 트레일이 3000~4000m급의 고산지대를 통과하는 것에 비해 1000~2000m 고도에서 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고산증을 겪을 염려가 없는 것도 장점이다. 보통 5~10명이 한 팀을 이루어 여행하기 때문에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것도 큰 즐거움의 하나. 여행 기간 숙박은 로지라고 불리는 도미토리(공동 숙박) 형식의 게스트하우스를 이용한다(단, 마지막 날 아구아스칼리엔테스에서는 원한다면 독립된 침실을 이용할 수 있다).

필자는 쿠스코의 Incapal 여행사에서 예약했다(문의: 51-984774859/ inkapal@hotmail.com).

 

 

기자명 탁재형 (다큐멘터리 프로듀서)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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