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26일, 임수경 국회의원 당선자(민주통합당 비례대표)가 서울시 중구 남학동 옛 주자파출소 터를 찾았다. ‘남산 안기부 터를 인권·평화 숲으로!’ 만들자는 시민청원 운동을 선포하는 기자회견을 갖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남산 인근에 서 있기만 해도 속이 울렁거린다고 했다. 심지어 남산 1호 터널도 이용하지 못한단다. 23년 전 기억 때문이다.

1989년, 대학생이던 임 당선자는 독일을 거쳐 방북을 감행했다.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쪽으로 돌아오자마자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된 임씨는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요원들에게 이끌려 남산에 있던 안기부 ‘제5별관(5국)’ 건물 지하 2층 110호에 갇혔다. 임 당선자는 “110호에 들어서자마자 물고문용 욕조가 눈에 들어왔다. 조사관들이 드나들 때마다 옆방에서 비명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조사관 13명이 돌아가면서 24시간 내내 나를 취조해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알 수 없었다”라고 말했다.


안기부 별관, 10월 비워져

기자가 남산 안기부 터를 찾은 5월1일에는, 근로자의 날(노동절)을 맞아 휴식을 나온 나들이객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휴식의 공간, 남산. 하지만 임수경씨처럼 어떤 이에게 남산은 다시는 오고 싶지 않은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세종호텔을 거쳐 남산 소파길로 올라가는 길목에 위치한 서울 대한적십자사. 그 건물을 등지고 걸으면 옛 안기부 건물이 나온다.

인권재단 ‘사람’은 ‘남산 안기부 터를 인권·평화 숲으로!’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박래군 ‘사람’ 상임이사는 “남산은 역사적 현장인 동시에 민주주의의 미래다. 역사의 현장을 보존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곳 남산 안기부 터에는 10개 건물이 있는데, 현재 서울시청 별관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새 시청사가 완공되는 2012년 10월 이 건물은 비워질 예정이다.

군사정권 시절, 남산은 ‘정보기관’과 동의어였다. 1961년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가 남산에 중앙정보부(중정. 안기부를 거쳐 현재 국가정보원)를 설치했고, 1972년에는 중정 남산 본관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1994년 서초구 내곡동으로 청사를 옮기기 전까지 ‘남산’은 중정이나 안기부를 가리키는 별칭이었다. 중앙정보부장은 ‘남산의 부장’이었다. 남산에는 중정의 핵심 부서가 모두 입주해 있었다.

1981년 1월 전두환은 중정을 국가안전기획부로 개칭했다. 중정과 마찬가지로 안기부도 정권에 반대하는 민주화 인사들과 권력 내부 감시 대상자, 조작간첩 대상자들을 불법으로 납치하고 고문하곤 했다.

임수경씨가 진저리쳤던 제5별관에는 간첩 혐의 등을 조사하는 대공수사국이 위치해 있었다. 이곳의 고문은 악명 높아서 ‘다른 데에서 받는 고문은 마사지 수준이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지금은 없어졌으나 예전에 남산 1호 터널 근처에는 대형 철제문이 있었다. 당시 안기부 직원들에게 연행된 이들은 깜깜한 터널을 지나 대공수사국으로 끌려갔다. 이곳은 현재 서울시청 남산 별관으로 쓰인다.

서울 예장동 4-1번지에 위치한 서울특별시 도시안전실은 30여 년 전 ‘6국’으로 불렸다. 학원 사찰과 수사를 담당했다. 2층과 3층이 조사실로 쓰였다. 고문은 지하 1층에서 주로 이뤄졌다. 1975년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도예종씨 등 8명이 이 건물에서 고문을 받았다. 이들은 사건이 발표된 지 1년 만에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었고, 18시간 만에 형이 집행됐다. 2007년 1월23일 서울중앙지법은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 8명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가혹한 고문수사가 부른 ‘법적 살인’임이 33년 만에 드러난 셈이다.


건물 소유권 서울시에 있어

서울유스호스텔은 원래 중정의 남산 본관이었다. 1층에서 6층까지 행정 사무실로 이용되었다. 6층에 정보부장실이 있었다. 1973년 이 건물로 연행된 서울대 법대 최종길 교수도 고문을 받던 중 사망했다. 그러나 투신자살한 것으로 조작됐다. 2006년 유스호스텔로 리모델링하면서 본관 내부 형태가 달라졌다. 박래군 상임이사의 말에 따르면, 당시 리모델링할 때 설계도면 같은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전선과 배관 위치 등을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단, 현재 출입이 금지된 지하 통로는 그대로 보존돼 있다. 안기부로 끌려온 이들은 지하 통로를 통해 유스호스텔 앞에 있는 서울종합방재센터 지하로 끌려갔다.

서울종합방재센터의 옛 명칭은 ‘제6별관’. 지상 구조물이 없고 지하 3층까지 있다. 비상 상황이 발생할 때 대통령이 이곳에서 지휘를 했다고 한다. 현 TBS 교통방송 청사 건물도 안기부 소유였다. 또 소방재난본부와 남산창작센터는 각각 안기부 유치장과 안기부 요원들의 실내체육관으로 사용되었다.

현재 이 옛 안기부 터에 남아 있는 건물은 총 10개 동. 안기부가 세력을 확장하던 때에는 많게는 40여 동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건물이 생기거나 없어지는 일이 비밀리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정확하게 건물이 몇 채 있었는지, 어떤 용도로 쓰였는지는 알 수 없다. 예를 들어 본관 옆에 위치해 있던 제1별관은 1995년 안기부가 서울 내곡동으로 이전하면서 이듬해 폭파·해체되기도 했다. 주로 통신과 도청·감청이 이뤄지던 이곳의 건물 구조가 노출되어선 안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1995년, 안기부가 내곡동으로 이전하면서 남산에 있던 안기부 건물 소유권은 서울시로 넘어갔다. 그 뒤 남산을 어떻게 활용할지 논란이 시작됐다. 남산을 인권기념공원으로 활용하자는 의견이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 2003년에도 전국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 등 18개 인권단체가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에게 인권기념공원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이명박 시장은 이를 거부했다.

2009년 3월, 오세훈 전 서울시장 재임 시절 서울시는 ‘남산 르네상스 마스터플랜’을 내놓았다. 안기부 건물을 모두 없애려는 계획이었다. 유스호스텔과 도시안전실(당시 균형발전본부)을 시작으로 2015년까지 남산 별관, 소방재난본부, 교통방송을 철거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이즈음 학계·시민단체로 구성된 ‘역사를 여는 사람들 ㄱ’(대표 한홍구)은 통감 데라우치와 총리대신 이완용이 몰래 숨어 한·일병합 조약을 맺은 장소가 남산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통감관저 터가 발견되면서 남산의 역사적 가치가 재조명되었고 남산 건물을 철거하려던 오세훈 전 시장의 계획도 무산됐다.

서울시는 현재 시청 별관으로 사용 중인 건물을 비롯해 곧 비게 될 나머지 건물을 어떻게 활용할지 아직 확정하지 않은 상태다. 박래군 상임이사는 “근·현대사가 부끄럽다는 이유로 역사의 현장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 ‘남산’ 폭력을 체험하고 목격한 사람들을 기억하면서 인권·평화와 같은 민주주의의 미래를 꿈꾸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인권재단 ‘사람’은 5월 말부터 남영동 대공분실과 서대문형무소, 남산 안기부 터를 돌아보는 ‘인권기행’을 진행할 계획이다.

기자명 송지혜 기자 다른기사 보기 so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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